[역경의 열매] 김용현 (3) 아내의 결혼 조건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라”

입력 2012-10-04 21:05


스물다섯이나 먹을 때까지 나는 여자의 손목 한번 잡아보지 못했다. 사업하는 이들은 술과 여자를 가까이하게 마련이지만 난 여자 문제만큼은 깨끗했다.

고향 목포에서 옆집 아주머니의 소개로 한복심이란 이름의 여자를 만났다. 어물전 집안 딸로 19세의 어린이집 교사였다. 차분한 눈과 단정한 입매, 다소곳한 몸짓이 천사 같았다. 난 그녀를 보고 첫눈에 반해버렸다.

‘저렇게 착하고 예쁜 여자가 나를 좋아할까.’ 겉으로는 당당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내 투박한 말투와 교양 없는 모습에 질색해 도망가면 어쩌나 걱정했다. 다행히 그녀는 내가 싫지 않은 기색이었다. 내 말에 귀를 기울였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줬다.

첫 데이트를 마치고 양구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난 프러포즈를 하기로 결심했다. 그 전까지 내 인생이 탄광에서 혼자 금을 캐는 것이었다면, 그녀는 내 어두운 구석에 빛을 밝혀 금보다 귀한 보석을 보여줄 것만 같았다.

“저도 오빠랑 결혼하고 싶지만 조건이 있어요. 꼭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으면 해요. 나와 함께 신앙생활 할 수 있죠?”

그녀는 신앙생활을 했었다는 내 말에 몹시 기뻐했다. 그때만 해도 내게 신앙은 큰 의미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의 제안은 대수롭지 않았다.

우리는 목포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양구에 신혼집을 차렸다. 월세로 들어온,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이었다. 당시 내겐 돈이 별로 없었다. 아내는 나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했지만, 난 결혼 전 약속을 내팽개치고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서 사업 한답시고 집밖으로만 돌았다. 가난한 와중에 첫 아들을 낳았고 장모님이 쌈짓돈으로 병원비를 댔다. 둘째를 낳을 땐 내가 산파 역할을 했다. 갑자기 진통이 와서 이웃에게 도움을 청할 새도 없었다. 직접 아이를 받고서 태를 자르고 엉덩이를 때려 울게 했다. 아이가 나오는 모습을 보며 생명의 경이로움을 느꼈다. 아내는 품속에 새근새근 잠든 아이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당신의 큰딸이에요. 이 애가 보기에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가 돼 주세요.”

사업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전파상, 오토바이센터 등 돈이 될 만한 일들을 이것저것 해봤지만 모두 실패했다. 아내는 나를 위로하며 주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매달려 보라고 했다. 난 곧장 기도원에 들어갔다.

“주님, 저는 이대로 망할 수 없습니다. 제가 선택받은 일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세요.”

일주일 금식기도를 마치고 돌아왔지만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병역소집 통지서였다. 전라도 병무청에선 면제 판정을 받았는데 강원도에 와서 사정이 달라진 것이다. 금식기도를 하고 왔더니 응답이 고작 군대라니 황당하고 분한 마음이 들었다. 방위병으로 차출된 뒤 아내를 통해 병무청에 민원을 넣었다. 다행히 병무청에서 내 사정을 알아줘서 입대 100일 만에 의병 제대할 수 있었다.

제대 후 더욱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했다. 친한 장로님에게 자금을 빌려 다시 오토바이센터를 차렸다. 가시밭 같던 신앙생활에도 조금씩 싹이 나기 시작했다. 양구제일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렸을 때 아내가 세례를 권했다. 목사님은 내 심령을 겨냥이라도 한 듯 열정적인 말씀을 부어주셨다.

“우리 인생이 부귀영화만 쫓다가 끝나는 거라면 얼마나 불쌍합니까. 사업을 하더라도 연 단위로 경영계획을 세우는데 영혼을 위해선 어떤 계획을 갖고 있습니까. 없지요? 이대로 가면 망합니다. 무조건 회개해야 합니다!”

나는 “아멘, 아멘”을 외치며 통렬하게 회개했다. 주저 없이 단상 앞으로 나가 눈물을 흘리며 세례를 받았다.

“하나님, 시정잡배 같은 저를 존귀한 자로 쓰임 받을 수 있도록 이끌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주님의 뜻을 위해서 남은 삶을 바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정리=천지우 기자 mog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