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용현 (2) 가출·고철중개상·오징어배… 20세도 안돼 사장님이
입력 2012-10-03 17:55
13살 때 가출했다가 돌아온 뒤부터 나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아버지는 최소한 중학교는 나와야 한다고 하셨지만 난 장사를 배우고 싶었다. 15살 무렵 목포에서 가장 큰 철물점에 사환으로 취직했다. 사장님의 신뢰를 얻어 6개월 만에 배달을 나갔고 장부 정리 같은 중요한 업무도 맡았다.
나는 하루빨리 사장님처럼 유명한 사업가가 되고 싶었다. 계속 철물점에 있으면 나중에 가게를 물려받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기다릴 수가 없었다. 난생 처음 아버지 지갑에 손을 대 30만원 남짓한 돈을 훔쳐서 기차역으로 향했다.
‘이건 가출이 아니야. 언제까지 목포에서 배달이나 하고 있을 거야. 아버지는 이제 새엄마도 있으니 외롭진 않으실 거야.’
6년 전 가출했을 때와는 달리 마음속엔 고철 중개상으로 성공하리란 확신이 있었다. 밤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가면서 ‘성공하기 전엔 절대로 고향에 돌아오지 않으리라’고 굳게 다짐했다.
서울역 광장으로 나왔을 때 누군가 내 팔꿈치를 끌어당겼다. “예수님을 믿으세요. 정처 없이 떠도는 당신의 삶에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비칠 것입니다.” 딱 봐도 목사님처럼 보이는 남자가 전단지와 함께 따뜻한 커피 한잔을 건넸다. 서울에서 알아주는 건달이었다가 20세 때 하나님을 만나고 목회자의 길로 들어섰다는 그는 “학생을 보니 예전 내 모습이 생각난다”고 했다.
나는 목사님에게 “저도 구원을 받을 수 있나요”라고 물었다. 그는 “그럼요. 형제님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어 구원의 확신만 있다면”이라고 답했다. 목사님이 내 영혼의 구원과 미래를 위해 기도해주는 내내 심장이 쿵쾅거리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흥분을 느꼈다. 그 순간 목사님을 통해 나를 인도하고 계신 주님의 미세한 음성을 감지한 것이다.
서울 생활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아직 코흘리개인 나에게 일을 맡기는 사람이 없었다. “강원도에서 고철 중개업을 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을 듣고는 망설임 없이 강원도로 향했다.
처음 두 달 동안은 동해안 묵호에서 오징어 배를 탔다. 오징어잡이로 꽤 많은 돈을 만질 수 있었지만 일확천금을 꿈꾸던 나는 매일 밤 도박판에서 돈을 탕진했다. 그러다 풍랑이 거센 날 바다에 빠지는 사고를 당했다. 죽기 일보 직전 갑판장이 물 속으로 뛰어들어 나를 건져냈다. 주님이 갑판장의 마음을 움직여 방황하던 내게 삶의 기회를 주신 것이다.
오징어잡이 생활을 정리하고 양구로 가 그곳에서 꽤 잘나가는 고물상을 만났다. 그 밑에서 일한 지 6개월 만에 고물행상 면허를 따고 고물 중개업을 시작했다. 평생 떠돌이로 살 것 같던 내가 스무 살도 안 돼 ‘사장님’이 된 것이다.
나는 고물을 나름대로 개조해서 비싸게 팔아 돈을 제법 벌었다. 하지만 돈은 나를 교만하게 만들었다. 묵호에서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다시 도박에 손을 댔다. 내일은 없다는 듯 화투를 치는 방탕한 나날이 한동안 계속됐다.
그러다 스무 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난 아버지 생전에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했다. 아버지에게 예수를 전하지 못한 것도 지금 후회로 남는다.
당시 절망적인 마음에 혈서를 쓰려고 칼을 들었다가 순간적으로 손가락을 내리쳐 검지 마디 하나가 잘려나갔다. 극심한 고통에 바닥을 뒹굴었다. 그것으로 도박에 찌든 내 마음까지 도려내지길 바랐다.
‘아버지, 어리석고 못난 아들을 용서하세요.’
지금도 마디 하나가 없는 검지를 볼 때마다 그때 일이 생각난다. 도박의 늪에 빠지면 삶이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에 지난날을 통렬하게 반성하고 주님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으리라.
정리=천지우 기자 mog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