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선 목사의 시편] 안전제일
입력 2012-10-02 17:50
길을 걷다 보면 안전제일이란 문구가 적혀 있는 간판을 자주 보게 됩니다. 안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말이겠지요. 안전이 무너지면 아무리 좋은 건물을 지어도 소용이 없고 좋은 자동차를 만들어도 무가치하기 때문입니다. 매슬로(Maslow)의 욕구5단계설에서도 안전은 생리적 욕구 다음에 위치합니다. 인간 누구나 안전을 보장받고 싶어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상은 간판처럼 안전한가요. 안전제일이라는 간판보다 더 많은 위험 요소가 곳곳에 숨어 있습니다. 공사장이나 도로의 위험지대가 아닌 가장 기본적인 삶의 현장 깊숙한 곳까지 그것들이 침투해 있습니다. 그로 인해 탄식 소리가 높아집니다. 안타까운 눈물을 흘리며 절규하는 장면도 자주 봅니다. 집에서 잠자던 어린아이를 이불째 싸들고 가서 짐승 같은 몹쓸 짓을 하는 사람들이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불안감에 잠 못 이루게 합니다.
이를 어쩔까요.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나요. 해결방법은 없을까요.
곳곳에 방치된 물웅덩이나 망가진 도로, 붕괴 위험을 안고 있는 쓰러져 가는 담장도 위험한 요소겠지만 정말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는 것은 소리도 모양도 없이 은밀하게 숨겨져 있습니다. 언제 속에 감춰진 야수성을 드러낼지 모를 사람이 장말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돈이 없어 공부를 못하고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그래서 언제든지 속에 감춰진 상실감과 박탈감을 폭발시킬 위험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것입니다. 물론 넉넉한 환경에서도 얼마든지 위험한 인물이 나올 수 있고 절망적 가난을 딛고 착한 사람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믿습니다만. 3500년 전의 율법은 사회적 약자에 대해 공동의 책임을 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긍휼을 베푸는 일이기보다 바로 사회의 안전을 확보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조금씩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면 함께 행복한 세상이 되어 위험 요소를 키우지 않을 수 있습니다.
북한도 그렇습니다. 어느 정도 먹고살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극도의 위기감에 몰리면 무서운 폭탄이 되어 우리 사회를 위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안전제일’이 구호로 그칠 때 그것은 공허합니다. 구호를 쓴 간판보다 구체적인 안전장치를 마련해야 합니다. 주변 모든 사람이 굶주리고 있을 때 나 혼자 먹고 배부르면 가장 위험한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그러나 희망을 잃은 누군가를 공부시키고 먹인다면 나를 위한 최고의 안전장치가 마련되는 것입니다. 돈 몇 푼 아끼려다 곱게 자란 사랑하는 나의 아들과 딸이 위험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계산해야 합니다. 멀리 보는 셈법이 필요합니다.
<산정현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