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용현 (1) 초등생, 밤열차 타고 가출… 주님은 “돌아가라”
입력 2012-10-02 17:59
내 젊은 시절을 돌이켜보면 숱한 방황으로 얼룩져 있다. 그런 나를 하나님께서 이끌어 변화시키셨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역사하신 수많은 기적을 통해 ‘세상에 가치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깨달음을 얻게 됐다. 운명을 탓하면서 삶의 희망을 놓아버린 이들, 인생의 목적지를 몰라 방황하는 이들에게 내 인생을 보여주고 싶다. 나와 비슷한 고난과 아픔을 겪는 이들에게 “당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발견하라”고 간절히 전하고 싶다.
1946년 전남 목포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나는 동네에서 못된 짓을 일삼는 ‘잡놈 중의 잡놈’이었다. 학교에서 공부는커녕 어떻게 하면 맛있는 걸 훔쳐 먹을까만 고민했고, 약한 친구들을 두들겨 팼다. 집에선 아버지 구두 등 집안 기물을 몰래 들고나가 엿장수에게 팔아먹었다. 말썽꾸러기 골목대장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때부터 나를 조금씩 인도하셨다. 초등학교 같은 반 친구를 통해 교회 주일학교에 나가게 된 것이다. 목사의 아들이었던 친구는 유교 집안에서 신앙과 무관하게 자라온 나에게 “예수를 믿어야 구원 받는다”고 말했다. 여차하면 몇 대 패줄 요량으로 그 아이를 쭐레쭐레 따라갔다.
목사님은 나를 보자마자 “꼬마 깡패가 왔구나”라며 웃으면서 사탕을 쥐어주셨다. 목사님은 그때까지 내가 만난 어른들과 달랐다. 친구 같은 느낌이었고 무엇이든 솔직하게 고백하게 만드는 묘한 힘이 있었다.
처음 맞는 성탄절 아침, 나는 과자를 마음껏 먹을 수 있다는 말에 잔뜩 들떠 있었다. 친구가 헌금을 꼭 내야 한다고 해서 어머니를 졸랐다.
“엄마, 헌금 좀 줘. 오늘 성탄절이라 교회 가야 돼.”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못했지만 어머니는 두 말 없이 1000환을 꺼내 주셨다. 말썽쟁이 아들이 교회에 가서 철들기를 바라셨던 것 같다.
하지만 헌금은 교회에 도착하기도 전에 다 써버렸다. 팽이도 사고 오징어도 사 먹었다. 예배당에 와서는 내 몫의 과자와 사탕을 다 먹고도 친구들 것까지 뺏어 먹었다. 너무 많이 먹은 탓에 배탈이 났다. 너무 아파 방바닥을 구르면서 난생 처음 기도를 했다.
“예수님 생일날 제가 더 많이 먹어서 죄송해요. 앞으로 안 그럴 테니 한번만 용서해주세요.”
내가 7살 때 어머니가 동생을 낳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출산 후 5년 동안 시름시름 앓다가 하늘나라로 떠나고 말았다. 어렸던 나는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하루하루가 원망스럽기만 했다. 아버지 역시 술에 절어 지내며 자주 호통을 쳤다. 상실감과 반항심이 가득했던 나는 통제할 수 없는 괴짜로 변해갔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는 교회에도 발길을 끊었다. 웃고 떠드는 아이들을 보면 무조건 때렸다. ‘내가 이렇게 불행한데 왜 저놈들은 저토록 행복해 보이냐’는 불만에 예전보다 더 난폭하게 굴었다.
초등학교 졸업식을 앞둔 어느 날, 등굣길에 기차역으로 발길을 돌렸다. 해가 질 때까지 역 주변을 배회하다 서울로 가는 열차에 무임승차했다. 막상 서울에 도착하니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 지도만 들고 있었을 뿐 수중엔 동전 한 닢도 없었다. 역전파출소를 찾아가 사정을 털어놓으니 “쪼그만 게 벌써부터 가출이야”라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한 경사가 밥을 사주고 “다시는 가출하지 마라”며 목포행 기차에 태워줬다.
하루 만에 돌아온 나에게 아버지는 매를 들지 않았고 말없이 안고 울기만 하셨다. 그 뒤로 난 말썽을 피우지 않았다. 아마도 주님께서 내가 범죄의 길로 빠지지 않도록 지켜주셨던 것 같다.
◇약력=△1946년 전남 목포 출생 △64년 강원 양구에서 고물상 시작 △83년 서울에서 창호 특판점 개업 △89년 광산산업 설립 △2002년 데이빗종합건설 설립 △2003년 남광산업 설립 △2005년 광산스틸 설립 △2011년 사단법인 남광선교회 설립
정리=천지우 기자 mog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