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년, 이순신-⑬ 효도] 위대한 어머니와 위대한 아들
입력 2012-09-28 16:24
모든 생명에겐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다. 그러나 아버지와 어머니는 느낌이 다르다. 큰 바위같이 든든한 사람, 어려울 때 슬쩍 기대고 싶은 사람이 아버지라면, 한없이 넓고 언제나 품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사람은 어머니다.
이순신이 아버지를 직접 언급한 기록은 몇 번 되지 않는다. 큰아들의 결혼 직전 꿈에 나타나 조언한 것이 대표적이다. 자식의 혼사를 앞둔 이순신이 아버지의 마음으로 아버지를 그리워한 것이다.
반면 홀로 된 어머니는 100여 차례나 언급했다. 이순신이 어머니를 지칭할 때 쓴 대부분 표현은 ‘천지(天只)’다. 하늘 그 자체다. 때문에 심란한 꿈을 꾸고 “어머니 소식을 듣지 못한 지 벌써 7일이다. 몹시 애타고 걱정된다”고 했다. 또 49세 이순신의 머리카락에는 흰서리가 얹힐 나이임에도 “늙으신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라며 흰 머리카락을 뽑기도 했다.
이순신이 침략 수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욕을 완전히 파멸시킬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 때문일지 모른다. 이순신의 어머니는 히데요시의 어머니와 차원이 달랐다. 히데요시의 어머니는 아들 몸 걱정에 “제발 네가 직접 바다를 건너가는 일은 하지 말라”며 도해를 반대했다. 제 자식 귀한 것만 생각한 평범한 어머니였다. 그러나 이순신의 어머니는 자식보다 나라를, 사심(私心)보다 공심(公心)을 귀히 여겼다. 바다의 만리장성 이순신보다 나라를 더 사랑했다. 전쟁터에서 잠시 찾아온 아들과 헤어지면서도 아들 걱정 대신 “잘 가거라. 부디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야 한다”라며 “가르치고, 두세 번 타이를(1594년 1월 12일)” 정도였다.
이순신의 어머니는 억울한 누명을 쓴 그를 보기 위해 팔순이 넘은 나이에 죽음을 무릅쓰고 여수에서 아산까지 험한 바닷길로 왔다. 그러나 운명은 모자가 살아서 만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시신으로 돌아온 어머니를 마주한 이순신은 “하늘의 해조차 캄캄”했다. 장례도 다 못 치르고 떠나면서 “어찌하랴! 어찌하랴! 하늘 아래 어찌 나 같은 경우가 있겠는가! 어서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라고 울부짖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당부처럼 나라의 치욕을 갚기 위해 지친 마음과 몸을 이끌고 다시 전쟁터로 갔다.
이순신과 어머니의 관계는 진정한 효도와 자식 사랑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한가위다. 고향에 갈 수 없거나 혹은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면 보름달 속에서라도 부모님의 아름다운 얼굴을 찾아보자.
박종평(역사비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