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세대! 397의 귀환] 차가운 디지털시대에 염증 情이 있던 아날로그 갈망… 디지로그, 그때가 좋았다
입력 2012-09-28 16:25
우리는 왜 90년대인가
‘당신은 1990년대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아마도 이는 최근 우리 사회에 많이 회자되는 질문일 것이다. 특히 가요와 영화, 방송 등 대중문화계 전반은 90년대의 추억에 잠겨 있다. 시장에서 그간 ‘복고 상품’의 주된 아이템이었던 ‘7080 문화’는 변두리로 밀려난 모양새다. 사람들은 이제 90년대에서 추억을 찾고, 나아가 위로와 격려를 얻으려 한다.
한창 ‘세시봉 열풍’으로 전국이 들썩이던 지난해 3월 가수 조영남을 만났을 때 이야기다. 그는 자신과 옛 동료들에게 오랜만에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니 반가울 법도 하건만 인터뷰 내내 심드렁한 모습이었다. ‘복고(復古)’에 기댄 인기는 지나가는 ‘유행’에 불과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패션도 보면 시대에 따라 돌고 돌잖아요. 넥타이 길이가 짧아졌다 길어지고, 바지통이 넓어졌다 좁아지고…. 음악도 마찬가지죠. ‘반짝’하고 지나가는 관심일 뿐이라고 생각해요.” 그의 말처럼 1년6개월여가 지난 요즘 ‘세시봉 열풍’은 거의 사라졌다. 그렇다면 2012년 대한민국 문화계, 나아가 사회 전반에 부는 1990년대 복고 바람도 ‘반짝 유행’에 그치게 될까. 그간 ‘7080 문화’에서 향수를 달래던 대중이 올 들어 왜 갑자기 90년대 추억에 잠겨버린 것일까.
#90년대 신드롬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 올 상반기 극장가를 강타한 영화 ‘건축학개론’ 포스터에 적힌 문구다. 영화관에 들어가기 전, 이 문구를 보고 울컥한 사람들은 영화 상영 내내 등장하는 90년대 소품과 배우들의 패션, 무엇보다 94년 발표된 전람회의 노래 ‘기억의 습작’을 들으며 코끝이 알싸해지는 감정을 느껴야 했다.
‘건축학개론’은 멜로영화로는 이례적으로 400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 대박이 터진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가 발화시킨 90년대 복고의 불길은 가요계와 방송가 등 문화계 전반으로 확산됐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케이블 채널 tvN 드라마인 ‘응답하라 1997(응답하라)’이다. 지난 18일 방영된 마지막 16회 최고 시청률은 역대 ‘케이블 드라마’로는 가장 높은 9.47%(TNms 기준)를 기록했다. 방송사도 예상하지 못한 인기였다. 송창의 tvN 부사장은 “사내에서 ‘응답하라’ 기획안이나 대본을 보고 ‘인기를 끌 것이다’고 말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고 전했다.
“(대본의) 활자로만 봤을 땐 감이 안 왔죠. 그런데 방송이란 건 결국 ‘비주얼’이잖아요. 저는 제작진이 이 정도로 소품 등을 통해 90년대의 ‘디테일’을 살려낼 줄은 몰랐어요. 90년대가 방송 소재로 파워가 있다는 걸 ‘응답하라’가 증명해낸 셈이죠. 최근 2∼3년 동안 오디션 프로그램이 봇물을 이뤘듯 당분간은 90년대 향수를 자극하는 콘텐츠가 계속 나올 것 같아요.”
이 밖에 얼마 전 종영한 SBS 주말극 ‘신사의 품격’도 90년대 감성을 자극하며 쏠쏠한 재미를 봤다. 이 작품은 72년생 주인공 4명의 90년대 학창 시절 에피소드를 매회 프롤로그 형식으로 꾸몄다.
가요계 역시 ‘90년대 향수병’을 심하게 앓고 있다. ‘응답하라’ 주인공인 가수 서인국과 정은지가 리메이크한 90년대 인기 혼성그룹 쿨의 ‘올 포 유(All For You)’는 발표 당시 각종 음원차트를 석권했다. 가수 싸이가 77년생 동갑내기 뮤지션인 리쌍·김진표와 함께 부른 ‘77학개론’도 자신들의 10대 시절 추억담을 솔직하게 풀어내 인기를 끌고 있다.
# 왜 90년대인가
올해는 90년대가 ‘복고의 소재’로 본격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한 첫해로 기억될 것이다. 이 시대에 기반을 둔 문화 상품이 힘을 얻는 가장 큰 이유는 당시 10∼20대였던 대중이 구매력을 가진 문화 소비·생산자로 자라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90년대 문화가 가진 힘 자체에서 복고 열풍의 근본 원인을 찾는 목소리도 있다. 90년대는 양질의 문화 콘텐츠가 쏟아진 대중문화 황금기였다. 재조명하고 재해석될 소재가 풍부하다는 뜻이다. 예컨대 가요계만 보더라도 90년대엔 음반 판매량 100만장을 돌파하는 가수가 즐비했다. 김동률 이적 유희열 윤상 등 직접 자신의 음악 세계를 만들어가는 싱어송라이터가 각광을 받았다. 대중음악평론가 임진모씨는 “전자음이 배제된 음악이 인기를 끌던 마지막 아날로그 시대”라고 정의했다. 이와 함께 H.O.T, 젝스키스 등 아이돌과 팬클럽 문화가 본격적으로 생겨난 것도 90년대였다.
방송계 역시 SBS가 개국하고 케이블TV 시대가 열리면서 시청권이 확대됐다. 영화계는 박찬욱 이창동 김기덕 홍상수 등 재능 있는 감독들이 잇따라 출현, 2000년대 한국 영화 르네상스를 예고했다.
대중문화평론가 강태규씨는 90년대 복고 열풍의 이유를 이같이 말한다. “90년대에 청춘을 보낸 사람들은 그 이전 세대보다 ‘문화적 추억’이 더 많을 수밖에 없어요. 문화계 전반에 ‘웰 메이드 상품’이 많았던 거죠. ‘90년대 콘텐츠’는 낡은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 힘을 갖고 있어요.”
# 식지 않는 복고 열풍
90년대가 재조명받고 있지만 사실 우리 사회는 최근 2∼3년 동안 ‘복고의 시간’을 가졌다. 2010년 가을부터 불기 시작한 ‘세시봉 열풍’, 80년대 여고생들 모습을 리얼하게 재현해낸 영화 ‘써니’의 히트, MBC ‘나는 가수다’를 통해 다시 불려진 80∼90년대 명곡들의 음원 차트 독식, 90년대 활발하게 활동한 가수 임재범 이소라 등이 맞은 제2의 전성기….
잊을 만하면 반복되는 게 문화계 복고 열풍이지만 지금처럼 2∼3년간 지속되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전문가들은 지금의 복고 열풍이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파급력을 가졌다고 분석한다. 대중문화평론가 정덕현씨는 “앞으로 상당 기간 90년대 복고 바람이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우리 사회가 디지털 시대로 급속히 진입하면서 사람들은 ‘디지털’이 주는 차가움에 황망한 감정을 느끼고 있어요. 그러니 다시 따뜻함이 있는 ‘아날로그’로 돌아가고 싶은 거죠. 또 다른 이유는 사는 게 힘들다는 거예요. 90년대 후반 외환위기를 극복해냈지만, 시민들의 삶은 그때나 지금이나 계속 어렵잖아요. 좋았던 과거를 상상하며 위안을 얻으려는 심리가 작동하고 있어요.”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