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트로이 전쟁 일등공신은 당근?
입력 2012-09-27 17:52
당근,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다/ 리베카 룹/시그마북스
고대 트로이 전쟁 당시 아가멤논이 이끄는 그리스 군은 아무리 공격해도 트로이성을 함락시킬 수 없었다. 마침내 꾀를 내어 거대한 목마를 만든 뒤 그 안에 병사를 숨겨서 트로이성 안으로 들여보냄으로써 승리할 수 있었다. 당시 그리스 병사들은 목마 안에서 ‘설사를 멈추게 하려고’ 당근을 아작아작 먹었다는 얘기가 있다.
‘당근,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다’라는 책 제목은 이런 신화 속 에피소드 때문에 정해졌다. 하지만 책은 당근과 트로이 전쟁 얘기를 우물처럼 깊이 파들어가기보다는, 날렵하게 새로운 이야기 속으로 종횡무진 넘나든다. 이를테면, 당근에 함유된 비타민A가 왜 야맹증에 좋은지 등 식품 영양학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가 하면, 그것이 침소봉대된 과정에 대중정치가 숨어있음을 알려주는 식이다.
당근의 야간 시력 개선 효과 선전의 유래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영국과 독일 사이에 치러진 브리튼 전투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영국 공군은 새로 설치한 레이더망을 이용해 독일군 폭격기를 추적해 보기 좋게 격추시켰다. 영국 공군은 이 성공 신화를 부풀리기 위해 야간 비행사들의 시력 강화가 당근 덕분이라고 소문냈다. 당근 좀 먹는다고 밤눈이 완전히 밝아지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이 선전전은 전설적 비행사 존 커닝엄의 격추 성공담과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국민 사이에 널리 퍼져나갔다.
미국의 대중적 저술가 리베카 룹은 당근을 비롯해 오이, 샐러리, 고추, 아스파라거스, 양배추, 시금치, 가지, 토마토 등 인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20가지 채소를 매개로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의 비화를 풀어놓는다. ‘아스파라거스, 프랑스 왕을 유혹하다’ ‘양배추, 디오게네스를 당황하게 하다’ ‘시금치, 한 세대의 어린이를 속이다’ 등 소제목들은 자못 궁금증을 유발한다.
무겁지 않으면서 쏠쏠한 정보가 주는 경쾌함 덕분에 거칠고 거슬리는 번역에도 불구하고 책은 충분히 재미있게 읽힌다. 다양한 지식과 정보를 백화점식으로 나열하지 않은 것도 책이 가지는 미덕이다. 저자는 각종 문헌과 서신 자료 등까지 참조해가며 채소가 인류에 미친 영향을 역사·문화적 맥락에서 다룬다. 채소가 어떻게 인간에게 발견됐고, 어떠한 경로로 세계에 고루 퍼질 수 있는지 추적한다. 학명과 생물학적·계통학적 관점에서 접근한 부분도 눈에 띈다.
놀랍게도 유럽인들이 중세 암흑기 빈곤의 터널을 벗어날 수 있었던 건 단백질이 풍부한 콩 덕분이었다고 한다. 1840년대 아일랜드 감자 기근이 1348∼1350년 흑사병 사태 이후 유럽 최악의 재난으로 기록된 것에서 아일랜드인의 주식 감자의 힘을 느낄 수 있다. 아일랜드인들은 당근이 전래되고 나서야 지긋지긋한 감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고마움 때문인지 그들은 단맛이 나는 당근을 ‘땅속의 꿀’이라고 불렀다.
이렇듯 식탁 위에 세계사가 펼쳐진다. 지루한 세계사를 쉽고 재밌게 접근할 수 있는 새로운 통로가 돼 줄 것이다. 세계사를 쥐락펴락했던 채소의 이면을 알게 되면, 다 안다고 생각하던 저녁 밥상 위 채소들이 새삼 달리 보일 것이다. 박유진 옮김.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