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사의 풍경-백석의 만주 유랑과 해방정국] (2) 피아니스트 문경옥과의 결혼

입력 2012-09-27 21:08


단둥세관원 시절 짧았던 신혼… 방에 가구 하나 없어

백석이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 소속 측량 보조원을 그만 둔 것은 1940년 9월 말의 일이다. 일제의 창씨개명 강압에 반발해 사표를 낸 것이다. 같은 해 3월 근무 이후 불과 6개월 만에 안정된 직장을 팽개치고 나온 그는 신경(중국 창춘의 옛 지명) 중심에서 북쪽으로 10여㎞ 떨어진 백구둔이라는 농촌에 잠시 체류하며 농사를 짓는다.

“백구둔(白狗屯)의 눈 녹이는 밭 가운데 땅 풀리는 밭 가운데/ 촌부자 노왕(老王)하고 같이 서서/ 밭최뚝에 즘부러진 땅버들의 버들개지 피여나는 데서/ 볕은 장글장글 따사롭고 바람은 솔솔 보드라운데/ 나는 땅님자 老王한테 석상디기 밭을 얻는다”(‘귀농(歸農)’ 부분-1941년 4월 ‘조광’)

‘백구둔’은 당시 신경시 합륭구 제생갑 관할 구역이었으나 현재는 창춘시 관성구(貫城區) 신월로(新月路)로 바뀌어 있었다. ‘둔(屯)’은 만주국 행정구역 편제인 현(縣), 향(鄕), 촌(村) 다음의 가장 작은 부락단위다. 당시엔 20여 호의 농가가 자리한 자연부락이었으나 현재 신월로 일대는 신흥 아파트 단지로 변해 있었고 먼지를 뒤집어쓴 가로수 뒤엔 차량 정비소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현지 주민에 따르면 ‘흰 개’를 뜻하는 ‘백구둔’이라는 지명은 한때 ‘흰 호랑이’를 뜻하는 ‘백호둔(白虎屯)’으로 바뀌기도 했으나 지금은 신월로 아파트 단지로 편입됐으며 아파트엔 주로 외지인들이 살고 있었다.

백석은 ‘백구둔’을 거쳐 신의주와의 접경 지역인 안둥(安東·지금의 단둥)으로 옮겨간다. 안둥시청에서 일하고 있던 소설가 염상섭이 안둥 세관에 자리를 얻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1942년, 평양으로 건너가 피아니스트 문경옥과 결혼식을 올린 뒤 안둥에서 살림을 시작한다. 문경옥이라는 이름을 처음 언급한 이는 백석의 마지막 부인 이윤희이다. “남편은 전처가 있었는데, 이름은 문경옥이고 그때의 직업은 피아노를 배워주는 선생이었다.”(2001년 5월 1일 동아일보)

문경옥이 훗날 김일성의 후원을 받아 소련 레닌그라드(현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으로 유학한 북한 최초의 여성 작곡가 문경옥(1920∼1979)과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최근의 일이다. 문예지 ‘미네르바’는 2008년 가을호에 고서 수집가 문승묵씨가 발굴한 백석의 수필 ‘사생첩의 삽화’(‘매신사진순보’ 1942년 2월 1일자)의 영인본을 공개했다. 국배판(210㎜×297㎜) 잡지 2개면에 걸쳐 게재된 수필은 1인칭 화자가 평양에 사는 젊은 화가 친구의 그림첩을 보면서 그 중 두 점의 제작 뒷얘기를 전하는 내용이다.

“그는 그 아버지의 덕으로 평양서 한 삼 리나 되는 황해바다가 그리 멀지 안흔 곳에 큰 농장을 차지하고 잇는 젊은 지주인데 (중략) 추수를 감독하는 짬짬이 화상이 밈도는 때마다 화필을 들고 밤이면 등잔불 미테서 그가 조아하는 드라크르어를 읽는다는 소작인들의 들고오는 닭과 술의 대접을 밧고 한 것이다.”(‘사생첩의 삽화’)

백석이 말하는 젊은 화가란 문경옥의 오빠 문학수를 지칭한다. 문학수는 일본 도쿄에서 미술학교에 다니며 전국 규모 전람회에서 입상하기도 한 장래가 촉망되는 화가였다. 백석과 문학수는 처남 매부지간이 될 운명이었던 것이다. 농장 방문 때 추수를 했다고 하니, 때는 1941년 가을이었을 것이다.

백석은 자신이 아끼던 사생첩을 보여주며 각별한 정을 나눈 문학수의 중신으로 1942년, 평양에서 문경옥과 결혼식을 올렸던 것이다. 문씨 3남매는 평양의 유명한 변호사 문봉의 서출이었다. 처녀 시절, 그들의 어머니는 해주에 살고 있었는데 변호사였던 아버지가 해주에 와서 재판 송사를 맡아보다가 우연한 기회에 어머니를 보게 되자 자신을 미혼자로 가장하고 장가들겠다고 유인해 학수를 낳은 후 종적을 감추었고 3년 후 홀연히 나타나 다시 아이를 가지게 됐으니 그때 태어난 이가 문경옥이었다.

문경옥의 여동생 경랑의 평양여학교 친구 김자림(1926∼1994)은 이런 증언을 남겼다. “문경랑의 형부는 꽤 이름난 시인 백석씨였다. 어쩌다 그 친구네 집에 가면 형부가 지금 건넌방에서 주무시니 웃음소리도 크게 내서는 안 된다며 쉬쉬했다. ‘말 마, 얼마나 신경질인데. 가랑잎에 불이야. 시인은 다 그렇대나.’”(1986년 학원사 수필집 ‘부르지 못한 이름 당신에게’ 22쪽) 김자림은 1948년 평양사범대학 국문학과를 졸업한 뒤 1·4후퇴 때 월남해 희곡 및 방송작가로 활동했으며 남편은 ‘명태’ 등을 작사한 시인 양명문(1913∼1985)이다.

2004년 문경옥의 삶을 다룬 북한 소설가 최영학의 중편소설 ‘그의 교향곡’(2007년 12월 월간 ‘민족21’ 요약 게재)에 따르면 당시 그의 어머니는 비장한 결심을 하고 해주 용포 바닷가에 뛰어들었으나 동네 사람들의 구원으로 목숨을 구한 뒤 삯빨래를 하며 살다가 아이들의 장래를 위해 평양으로 문봉을 찾아간다. 어머니는 그 집에 식모살이로 얹혀살게 됐으나 문경옥은 그를 ‘아버지’라고 한 번도 부르지 않고, ‘웃채 영감’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평양 제3여고에 입학한 경옥은 ‘웃채 영감’에게 피아노를 사달라고 졸라 파아노를 배웠다.

1937년 도쿄의 무사시노(武藏野) 음악학교 피아노과에 입학한 경옥은 1942년 봄, 졸업 발표회에서 조선인으로서는 드물게 독주가로 선발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여자정신대를 닥치는 대로 뽑아가던 시절이었다. 문경옥은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부랴부랴 평양으로 돌아왔다가 오빠의 중신으로 백석과 결혼을 올린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그의 교향곡’에 백석과의 결혼 사실이 전혀 언급돼 있지 않다는 점이다. 다만 소설은 1946년 11월 19∼20일 이틀간에 걸쳐 평양시공관에서 열린 피아노독주회에서 26세의 피아니스트 문경옥이 처녀작 ‘8·15환상곡’을 1시간 반에 걸쳐 독주했으며 그 자리에 있던 김일성의 눈에 띄어 레닌그라드 음악원에 국비유학을 갔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유학 기간은 7년이었으며 1949년 봄,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일성이 레닌그라드에 들렸을 때 문경옥은 유학생 대표로 3차례 만나는 등 김일성의 총애를 받는다.

문경옥은 김일성에 이어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으로부터도 신임을 받았다. 그가 1970년 작곡한 ‘북청교시 그 열매가 온 나라의 주렁졌소’는 김정일로부터 “민요곡을 아주 잘 썼다”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후 문경옥은 김순남과 더불어 북한 현대음악의 양대 산맥으로 평가받는 작곡가 이건우와 결혼하기에 이른다. 이런 정황으로 인해 과거 백석과의 결혼 사실은 은폐시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백석의 안둥 생활은 그의 영생고보 제자 김희모의 회고를 통해 엿볼 수 있다. 김희모는 1942년 말 하얼빈의학전문학교에 다니다 방학을 맞아 고향인 함흥으로 가는 중, 안둥에 내려 옛 스승을 찾아갔던 것이다.

“마침 점심 때였는지라 선생님께서는 옛 제자를 당신의 숙소로 이끌었다. 숙소는 세관의 관사인 듯 꼭 같은 생김새의 건물들이 여러 채 빼곡히 들어찬 곳의 어느 한 집이었다. 방이 하나, 어두컴컴한 부엌이 하나, 작은 마루가 방과 부엌 사이에 있었다. 나를 소개하는 백석선생의 등 뒤에는 아마도 부인인 듯 키가 자그마한 한 여성이 서 있었다. 당시 모두가 고통스럽지 아니한 사람이 없었겠지만, 백석선생의 삶도 만주에서 별반 안정된 것이 되지 못한 듯 하였다. 부인이 차려준 조촐한 점심상을 안방에서 선생님과 겸상으로 먹었다. 방벽에는 아무런 가구 하나 없었고, 부인이 틈틈히 꽃무늬 수를 놓았음직한 희고 커다란 천이 한 장 둘러 쳐져 있어서, 그 안에다 몇 벌의 옷들을 걸어둔 듯 하였다. 선생님과 나, 그리고 부인인 듯 여겨지는 그 아주머니와 세 사람은 점심을 먹으면서 그저 묵묵히 침묵하였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고향으로 돌아왔었는데, 그 후 곧 분단이 되었고, 우리 가족들은 남으로 내려왔으므로, 내가 그때 백석선생님을 안동으로 찾아가서 만났던 것이 나에겐 마지막 모습이었다.”(‘내 고보 시절의 은사 백석 선생-월간 ‘현대시’ 1990년 5월호)

백석의 결혼은 오래가지 못했다. 부인 이윤희에 따르면 문경옥은 당시 임신 8개월의 아이를 유산시킨 것으로 인해 시어머니와 사이가 틀어져 이혼을 했다고 한다. 문경옥은 이후 평양에 진출, 1946년 11월 김일성 앞에서 ‘8·15환상곡’을 연주한 것을 계기로 여성음악가로 대성했던 것이다.

창춘·단둥(중국)=글·사진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