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주부들 살림살이, 명화 속에서 찾다… ‘살림하는 여자들의 그림책’

입력 2012-09-27 17:40


살림하는 여자들의 그림책/베아트리스 퐁타넬/이봄

남편과 아이들이 각각 회사로, 학교로 가고 난 후 윙윙 진공청소기를 돌리며 집안을 청소하는 건 동서양을 막론한 주부들의 오전 일과다. 주기적으로 찬장 속 그릇도 정리하며 말끔해진 살림살이를 흡족한 표정으로 바라볼 것이다. 이처럼 반질반질한 집안에 대한 취향은 거슬러 올라가면 17∼18세기 네덜란드 주부들에게서 시작됐다. 당시 출간된 ‘노련하고 사려 깊은 주부’라는 가정생활지침서에 따르면, 주부들은 새벽마다 집 앞 계단을 물로 닦아야 했다. 손님이 청소한 집안에 들어갈 때는 흙 묻은 신발을 벗고 집주인이 빌려주는 덧신으로 갈아 신는 게 관례였다.

# 명화 속 살림살이를 훔쳐보다

이런 풍속을 문자 기록보다 더 생생히 확인할 수 있는 게 유명 화가들이 남긴 명화다. 요하네스 베르메르, 앙드레 부이 등 당시 대표 화가들이 여성을 모델로 해서 그린 그림을 두고 흔히 숭고미나 빛의 표현에 대해 얘기한다. 그러나 시선을 달리하면 거기 주부들이 윤내며 가꾸었던 살림살이가 있다. 바로 가사의 여왕을 떠올릴 만큼 청결에 집착했던 주부들의 삶이 있는 것이다.

프랑스의 시인, 도상학자이면서 주부이기도 한 저자 베아트리스 퐁타넬이 주목하는 것도 이 지점이다. 이 책은 저자가 명화를 통해 길어 올린 중세부터 20세기까지의 인테리어 역사다. 아이를 키우고 살림을 하는 저자는 그림 속 여성들에 공감한다. 반짝반짝 윤이 나도록 닦아 식기장 안에 공들여 정리한 그릇, 수돗물이 들어오기 전이라 최대한 물을 아끼며 설거지하는 소녀의 표정, 빗자루로 정성스럽게 빗질하는 여인의 뒷모습 등을 저자는 애정을 가지고 바라본다.

이 같은 저자의 시각에 의해 그림 속 여성들은 남성 화가들의 눈에 포착돼 그려진 수동적 모델이 아니라 당대 가장 유행하던 옷을 입고, 새 물건을 사들이고, 집안이라는 공간에서 가장 영향력을 행사하던 적극적 주체로 거듭난다.

주부인 만큼 저자의 명화 읽기는 남성들의 눈길이 미치기 힘든 부분들에 머문다. 그림 속에서 부수적 요소인 결혼 예물 궤짝, 가난한 사람들이 물건을 둘 곳 없어 천장의 들보에 매달았던 수납공간, 자질구레한 수납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 등장한 서랍장, 바닥을 쓰는 데 유용했던 빗자루 등이 저자에 의해 새롭게 빛을 발하는 것이다.

# 역사·사회사·문화사적 깊이까지 갖추다

침실 난방 부엌 실내장식 조명 식당 욕실 거실 수납 살림살이 등 책의 목차는 여성스럽다. 하지만 각각을 다루는 깊이는 예사롭지 않다. 궤짝이 일어서서 장롱이 되고, 빗자루가 진공청소기가 되어가는 변천사를 사회·문화·경제사적 맥락에서 짚어주기 때문이다.

저자의 식견이 두드러지는 부분은 침실과 난방이다. 우리나라는 고구려 때부터 온돌을 사용해 겨울철 난방을 해결했다. 하지만 온돌 시스템이 없었던 서양에선 난방이 가장 큰 숙제였다. 서양인들이 중세에서 현대까지 오면서 난방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고, 그것이 명화 속에 어떻게 녹아있는지를 저자는 흥미롭게 보여준다. 중세 가정집의 거대한 침대 주위엔 밤새 추위에서 보호해주기 위한 두꺼운 커튼이 쳐져 있었다. 모피로 만든 잠옷도 있었다. 부자이건 가난한 사람이건 몸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여럿이 한 침대에서 잤다.

귀족의 집에서도 난방은 충분하지 않았다. 나무 둥치를 통째로 태울 수 있는 큰 규모의 벽난로 앞에서 사람들은 타오르는 불길 쪽으로 손과 얼어붙은 발을 내밀었다. 조금이라도 온기를 더 느끼려고 불 앞에서 옷자락을 걷는 모습은 중세 겨울 가정집의 일상 풍경이다.

추위를 이겨낼 수 있는 각종 도구도 고안됐다. ‘탕파’라고 불리는, 침대와 이불 사이 공간을 띄워주는, 나무로 만든 틀이 있었다. 이 틀 안에 뜨겁게 달군 돌을 매달아 놓거나 뜨거운 물주머니를 넣어 더운 열기가 침대 안으로 고루 퍼지게 했다. 발이 얼어붙는 걸 막아주는 발보온기도 있었다. 18세기 난로가 보급되면서 생활양식은 급격히 변했다. 여유가 있는 집에선 벽난로가 거실의 주된 장식적 요소가 됐다. 벽난로는 프랑스에서 특히 유행했다. 독일 헝가리 폴란드 러시아 등의 북유럽과 동유럽에서는 난로가 널리 퍼졌다. 난로가 더 효율적이었지만, 프랑스인들은 집안의 중심이자 ‘제단’으로서의 상징적 의미까지 있었던 벽난로를 20세기 중반까지 버리지 않았다.

이런 시대상의 변천이야말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유명 화가들의 그림 속에 담겨져 있지만, 주류 미술사에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저자의 새로운 관점에 의해 의미를 갖고 새롭게 분류돼 인테리어의 역사로 탄생한 것이다.

중세부터 20세기까지의 이야기가 이렇듯 생생하게 전달되는 것은 저자가 당대 분위기를 충실하게 기록한 문헌과 그 시대의 일상사를 기록한 역사서들을 섬세하게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문학작품과 일간지에서도 당대 목소리를 불러온다. 마치 그 시대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구체성을 띄는 것이 이 책의 미덕이다. 심영아 옮김.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