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훈의 현대시 산책 감각의 연금술] (33) 장외 홈런의 승부사… 시인 서효인
입력 2012-09-27 17:43
동네에서 세계로 뻗어가는 시적 직구
윤리만이 인간의 유일한 마그마 설파
한국 프로야구 출범 한 해 전인 1981년, 전남 목포의 한 평범한 가정집에서 개구쟁이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아이는 프로야구와 함께 성장했다. 야구장은 놀이터이자 세상의 전부였다. 초등학생 때 야구를 보기 위해 어린 사촌 동생들을 데리고 야구장 담벼락에 붙어 있는 건물 2층 높이의 사다리를 기어오르는 위험천만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그 문제아가 시인 서효인(31)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고교 때 그의 글 솜씨를 알아본 담임선생님의 강권으로 문예부에 들어갔지만 시인이 될 것이라는 확신은 없었다.
군 제대 이후에도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뭔지 몰라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다 석 달 만에 접기도 한 그는 2006년 계간 ‘시인세계’로 등단한 후 2009년 전남대 대학원에서 국문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상경한다. 하지만 작은 출판사에 취직은 했으되 극심한 생활고를 겪었다. 월급으로 집세를 충당하느라 도시락을 싸가지고 출근했고 버스비가 없어 동전을 긁어모은 날도 허다했다. 회사 경리가 밀린 월급을 부쳐준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고 퇴근길에 그토록 먹고 싶었던 간짜장 곱빼기를 시켜 먹었다가 월급이 들어오지 않아 고향의 어머니에게 손을 내민 적도 있었다. 이러한 경험은 2030세대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밑바탕이 됐다.
“항문에서 바람이 거세게 불어옵니다. 당신의 등을 밀어냅니다. 그럼 이제 당신 차례, 꽃의 슬픈 유래나 강물의 은결 무늬에 대한 노래에 항문이 간질간질하던 당신, 구타의 음악 소리에 볼기짝이 꽃처럼 붉어져 혼자 타오르고 있던 당신, 무거운 가방에 매달려 참고서를 완주하던 당신, 바로 당신. 붉은 엉덩이를 치켜들고 만국의 소년이여, 분열하세요. 배운 대로, 그렇게.”(‘소년 파르티잔 행동지침’ 부분)
첫 시집 ‘소년 파르티잔 행동지침’(2010)을 낸 직후 그는 이렇게 털어놨다. “시집에 하나의 도시를 건설하고 싶었다. 이들이 모두 미시적으로 연결돼 있는, 이를테면 ‘더블린 사람들’ 같은, 알고 보면 모두 관련 있는 동네 사람들이기를 바랐다.” 이러한 구상을 토대로 그는 인부, 다방 레지, 마트 직원, 슈퍼 주인, 독거노인 등 후기자본주의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다양한 처지의 인간 군상을 스케치했다. 야구에 비유하자면 그는 펜스를 맞히는 장타를 친 셈이다. 실제로 그는 문학인 야구팀 ‘구인회’의 포수로 활약하고 있지만 일단 타석에 들어서면 늘 한 방 홈런을 노리는 장타자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두 번째 시집 ‘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2011)으로 제30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한 것은 그에게 장외 홈런이나 마찬가지다.
“아이티에서 진흙 쿠키를 먹는 아이를 보면서 밥을 굶지 말자, 진흙 같은 마음을 구웠다. 내전이 빈번한 나라처럼 부글부글 끓는다. 라면 같은 그것을 날마다 먹어야 한다. 스스로를 아끼자, 스프 같은 마음을 삼켰다. 한 장의 휴지를 아끼기 위하여 코를 마셨다. (중략) 마그마처럼 헛구역질을 하며 괴상한 소리를 내 본다. 뜨거운 다짐들이 피부를 뚫고 폭발한다. 바로 이곳에 서 있다. 들끓는 마음을 가진, 괴물”(‘마그마’ 부분)
공간 인식이 동네에서 세계로 확장되기는 했으나 그는 지속적으로 우리 안의 약자들을 호출해왔다. 세계에 만연된 폭력성에 맞서 내면에서 들끓고 있는 마그마란 다름 아닌 도덕과 윤리이다. 이제 무한히 분열한 만국의 파르티잔들의 내면에서는 죄를 짓고, 참회하고, 몰락하고, 반성하는 마음이 한꺼번에 끓어오른다. 서효인은 “우리 자신이 바로 들끓는 마음을 가진 괴물”이라고 말한다. 아이티의 아이가 진흙 쿠키를 먹는 것을 보면서 밥을 굶지 말자는 다짐은 비록 타인을 도울 수는 없지만 타인을 침해하지 않는 한에서 윤리적이다. 서효인은 우리들에게 윤리적인 괴물이 돼 사회적 관계의 완강한 바깥에 거하자고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