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건강 안녕하십니까-(2부) 학생 정신건강 현주소] (1) 넘쳐나는 잔혹게임

입력 2012-09-23 18:38


‘폭력 게임의 바다’ PC방… 정부 대책도 소용없다

국민일보는 10대 청소년들의 정신건강을 위협하는 요인들에 초점을 맞춰 오늘부터 정신건강 시리즈 2부를 연재합니다. 2부는 ‘넘쳐나는 잔혹게임’을 첫 회로 알코올 중독, 음란물, 폭력적 또래문화, 과도한 성적경쟁, 스마트폰 중독 등을 주제로 6회까지 연재됩니다. 편집자 주

지난 14일 경기도 안양 번화가의 한 PC방. PC방에서 청소년들이 퇴장해야 하는 오후 10시가 다가오고 있었지만 교복을 입은 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 게임에 심취해 있었다. 눈은 모니터에 꽂혀 있었고 입에서는 거친 욕설이 튀어나왔다. 욕설의 대부분은 옆자리에서 같은 게임에 동시 접속해 팀을 이룬 친구들을 향한 것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인 C군은 친구 4명과 나란히 앉아 ‘사이퍼즈’라는 게임에 몰두하고 있었다. ‘GTA4(그랜드 테프트 오토4)’나 ‘맨헌트’ 같은 엽기적인 소재는 아니었지만 2시간여 동안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상대편을 칼로 찌르고 베고 있었다. 그는 “과거에는 ‘서든 어택’(1인칭 슈팅게임)을 주로 했지만 최근에 칼로 베는 종류로 바꿨다”면서 “칼로 사람이든 뭐든 베는 느낌이 총으로 쏘는 것보다 스트레스가 더 풀린다”고 설명했다. 이어 “GTA4나 맨헌트는 이미 고등학생 정도 되면 지겨워졌을 것이고 요즘에는 초등학생이나 하는 철 지난 게임”이라고 덧붙였다.

◇게임물 등급제는 무용지물=정부가 게임으로부터 청소년을 보호하기 위해 내놓은 방안들이 현장에서는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었다. 청소년들은 ‘약간의 불편함’이라고 치부했다. 그 정도 불편함으로 청소년들이 불법 게임에 빠져드는 걸 막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이다.

오후 10시부터 청소년들이 PC방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한 정책에 대해 C군과 그 친구들은 “집에 가서 하면 된다. 친구네도 있다. 멀티방(PC방+노래방+게임방 결합형태)을 이용하면 제약을 받지 않는다”고 일축했다. 게임물의 선정성과 폭력성 등을 판단해 연령별로 접근을 제한하는 ‘게임물 등급제’ 역시 부모님이나 친지들의 주민등록번호를 통하면 된다는 식이다. 청소년들은 어른들의 개인정보를 친구들끼리 공유하기도 한다. 부모의 주민등록번호로 만든 아이디는 자신이 쓰고, 삼촌 등 친척의 주민번호를 통한 아이디는 친구들에게 빌려주는 식이다.

한국소비자연맹 조사 결과 청소년 중 39.4%(568명)가 게임을 하려고 부모님이나 타인의 주민등록번호, 신상정보를 이용했다. 고등학생은 57.2%에 달했다. 명의도용 경험을 털어놓은 청소년 가운데 74.8%는 위법인줄 알면서도 ‘가족이나 친구라 걱정하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안동현 한양대 의대 교수(정신과 전문의)는 “게임 중독을 막기 위해서는 결국 게임 회사들이 나서야 한다”며 “청소년들이 즐기는 대부분의 게임은 시간을 많이 투입할수록 가상 세계에서 높은 지위를 얻게 되는데 이것이 가장 큰 문제”라면서 “일정 시간 이상 게임을 할 경우 게임 캐릭터의 계급이 내려가도록 설계한다면 상당히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제안했다.

◇가상세계와 현실 구분 잘 못해=전문가들은 면밀한 관찰을 통해 게임 중독 초기 증상을 포착할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다른 중독과 마찬가지로 게임 중독 역시 초기에 바로 잡지 않으면 걷잡을 수 없으므로 세심한 관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두드러진 특징은 수면부족이다. 밤늦게까지 잠을 안 자고 아침은 물론 수업시간에도 수면부족을 호소한다. 게임을 못하게 하면 민감하게 반응하며 평소 친한 친구들과 소원해진다. 또한 게임 시간을 늘리기 위해 어른들과 협상하며 부모님의 호통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자신의 행선지를 꾸며대거나 PC방에서 목격됐다는 소리를 자주 듣게 된다. 무엇보다 성적이 이유 없이 떨어지면 학생의 신상에 무엇인가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의심해봐야 한다.

창동 아이윌센터(인터넷 중독 예방 기관) 조민아 팀장은 “게임 중독 청소년의 경우 폭력적으로 돌변하는 등 충동조절 문제를 비롯한 정신건강 이상이 발견된다”면서 “(폭력 게임에 심취해) 모방 심리로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학생도 있고, 가상세계와 현실의 구분이 잘 되지 않는 청소년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도경 김수현 기자 yid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