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김경집] 인격의 문화를 되찾자
입력 2012-09-23 19:50
시끄러운 세상이다.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소리를 질러댄다. 소리를 지르는 건 상대가 내 말을 들어주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서로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있으니 그렇게 꽥꽥댄다. TV를 틀어도 마찬가지다. 특히 연예인들이 우르르 나와 재담을 겨루는 오락프로그램은 서로 제 이야기를 하느라 남 이야기는 듣지도 않는다. 자기 방송 분량을 확보하기 위해서겠지만 보는 내내 불편해 결국 채널을 돌리게 된다.
심지어 차분하게 걸으며 자신과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조용한 산책길도 목소리 큰 사람들이 점령한다. 올레길을 걷다가 무더기로 떠들면서 지나는 이들을 보면서 절망한 적이 있다. 식당도 술집도 커피전문점도 왁자지껄 시끄럽기는 매한가지다. 도무지 갈 곳이 없다. 종교에서조차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
타인의 시선만 관심쏟는 사회
도대체 왜 이렇게 시끄러울까. 수전 케인은 ‘콰이어트’라는 책에서 시끄러운 세상에서 조용히 세상을 움직이는 힘을 강조한다. 그녀가 말하는 힘은 바로 내향성이다. 그녀는 무작정 달려들기보다 차분히 고려하는 기질을 살려내야 개인이, 그리고 사회가 건강해질 뿐 아니라 창의적일 수 있다고 말한다.
‘조용하면서도 의연한’ 사람이 세상을 바꾼다. 인종차별 버스에 항의해서 경찰서에 끌려간 뒤 버스 보이콧을 이끌어냈으며 결국 인종차별을 미국의 전체 문제로 확산시킨 주인공 로자 파크스는 체구도 작고 조용한 사람이었다.
케인은 미국에서 이른바 성공학 혹은 자기계발서의 선구자였던 데일 카네기의 경우 오로지 외향성을 지닌 인간만 강조했다고 비판한다. 그것은 지금의 우리에게 고스란히 적용된다. 대부분의 자기계발서나 성공을 다룬 책들은 거의 예외 없이 적극적으로 나서라고 자극한다.
물론 필요한 덕목이다. 그러나 물러설 때와 조용히 자신의 삶을 내재화할 수 있는 시간과 계기도 필요하다. 그런 조화 없이 오로지 외향성만이 성공의 덕목이라고 떠들어대니 모두가 소리만 질러대며 나댈 뿐이다.
문화역사가 워런 서스먼은 이것을 ‘인격의 문화’에서 ‘성격의 문화’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인격의 문화에서 이상적인 자아는 진지하고, 자제력 있고, 명예로운 사람이었지만 성격의 문화에서는 타인의 시선에만 집중하는 타율적 자아만 존재한다.
지난 칼럼에서 학교 폭력을 언급하면서 그것이 단순히 학교의 문제로 그치는 게 아니라 더 멀리 정치적으로 보면 미래의 중간계층이 도덕적으로 붕괴되는 전초라고 경고했다. 학교 폭력의 근원도 따지고 보면 친구들의 가치를 인격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빠른 시간 내에 성격으로만 판단하려는 조급증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인격의 문화는 내향성을 수용하고 길러내지만 성격의 문화는 오로지 외향성만 강조하고 자유롭고 독립적인 개인의 내향성을 억압한다. 이미 그것 자체가 폭력이다. 그런데도 지금 우리 사회는 내향성을 철저히 무시하고 억압한다. 내향적인 사람이 서 있을 곳이 없다. 그러니 세상이 시끄럽다.
침묵과 고독의 가치 깨달을 때
소리를 질러대는 사람들은 대부분 참을성이 없다고 한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줄 수 있는 시간과 여유가 필요하다. 조용히 말할 때 오히려 상대가 귀를 기울이고 경청한다. 때로는 침묵하고 고독할 수 있어야 한다. 침묵과 고독의 힘과 가치를 깨달아야 한다.
고독은 자발적 고립이다. 반면 고립은 타율적 고독이다. 사람들은 고독을 고립으로 착각한다. 그래서 정작 스스로 고독을 택한 사람도 자신이 고립되었다고 느끼게 된다. 그걸 감내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제발 목소리를 낮추고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자. 소음은 폭력이며 미래의 창의성마저 앗아가는 괴물이다.
김경집 인문학자·전 가톨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