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생활형 간첩’… 찌질한 가장의 날렵한 몸짓

입력 2012-09-23 17:56


영화 ‘간첩’서 22년차 고정간첩 김 과장 김명민

사극 ‘불멸의 이순신’, ‘하얀 거탑’의 천재 의사, 강마에 열풍을 일으킨 ‘베토벤 바이러스’, 영화 ‘내사랑 내곁에’의 불치병 환자. 배우 김명민(40)의 대표작은 일일이 열거하기가 힘들 정도다. 맡는 배역마다 뛰어난 몰입도로 새 캐릭터를 만들었던 그가 이번엔 생활형 간첩이라는 새 분야를 개척했다.

지난 19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김명민은 20일 개봉한 영화 ‘간첩’(감독 우민호)에서 22년차 고정간첩 김 과장 역할을 맡았다.

북한에서 지령은 오지 않고 그저 먹고 살기 바쁜 소시민이 된지 오래다. 어느 날 남한으로 귀순한 북한 고위간부를 암살하라는 지령이 10년 만에 떨어진다. 그는 북에서 파견된 첩보조직 간부 최 부장(유해진), 총을 어디에 두었는지도 가물가물한 간첩 강 대리(염정아) 윤 고문(변희봉) 우 대리(정겨운)와 함께 작전에 투입된다.

“이번에도 첫 작업은 캐릭터 구축과 분석이었지요. 김 과장의 대사가 엄청 많아서 말을 천천히 하면 지루할 것이라고 판단했죠. 말은 무조건 빨리하자, 호흡이 늦으면 실패한다. 여기에 두뇌회전이 빠른 리더의 모습과 평범한 가장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려 했고요.”

그는 “간첩이라고 얼굴에 써놓고 다니는 게 아니라 간첩의 본능을 어떻게 보여줄까 고민했다. 전작처럼 의사나 지휘자가 아니니까 기술적으로 연마할 부분은 없었지만 철저한 계산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북한 사투리는 연기 지도를 따로 받았다. 그는 “촬영장에서 정말 재미있는 일이 많았다. 이런 거 적어두자, 나중에 에피소드 물어보면 꼭 얘기해야지 했는데 막상 지금은 아무것도 기억 안난다”며 웃었다.

전과 달리 눈에 띄는 부분은 날렵한 액션연기다. 그는 ‘찌질한’ 가장의 면모를 유지하면서도 순간 순간 특수훈련에서 뿜어져 나오는 본능적인 날렵함을 보여준다. “2002년에 6개월 정도 특수훈련을 받았어요. 액션스쿨도 다녔고요. 평소 운동을 좋아하고 웨이트 트레이닝도 오래했지요. 제가 액션에 대한 감이 있는 것 같아요.”

직업으로 연기를 해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 그 전부터 학예회나 교회에서 성극을 하면서 연기하는 재미에 빠졌다. 서울예술대학 연극과를 나왔다. 2001년 데뷔작인 영화 ‘소름’으로 그 해 신인상을 휩쓸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많은 관심을 받았지만 일은 절망적일 정도로 풀리지 않았다. 당시 80억원을 들인 블록버스터 ‘스턴트맨’이 촬영 15%를 남기고 투자사가 빚더미에 앉으며 중단됐고, ‘선수 가라사대’와 ‘빅하우스닷컴’이라는 영화도 개봉 직전 줄줄이 엎어졌다.

자연스레 영화계에서 잊혀지면서 뉴질랜드로 이민까지 결심했을 때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을 만났다. “인지도 뿐 아니라 제가 연기를 다시 할 수 있게 해준 작품이지요.”

어느덧 배우 12년차. 꿈과 현실은 많이 달랐다. “밖에서 물을 보는 것과 물에 발을 담그고 있는 것은 차원이 달랐지요. 이미 담근 물은 현실이자 전쟁터였지요. 현실에선 큰 산을 넘으면 또 산이 나오고, 예상치 못한 삶이 스펙터클하게 펼쳐집니다.”

여전히 연기는 어렵다. “연기를 통해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은 일종의 정신병 같아요. 하지만 극한의 상황에서도 즐기자고 생각해요.”

배우가 아닌 자연인 김명민은 어떤 순간에 행복감을 느낄까. “지인들과 함께 밥 먹는 시간을 좋아하지요. 누군가에게 뭔가를 손으로 직접 만들어주고 맛있게 먹고 그런 게 행복해요. 잠자기 전 아들과 30∼40분 침대에서 막 뒹굴어요. 초등학교 2학년인 아들과 소통하는 유일한 시간이죠. 쉬는 날이면 북한산을 오릅니다.” 영화 속 김 과장처럼 가족·친구와의 소중한 일상을 말하는 순간 그는 가장 행복해보였다.

한승주 기자 sj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