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등급, 불편한 진실] 현대판 양반·상놈… 금융계급에 울고 웃는다
입력 2012-09-21 18:50
여태 몰랐다. 급전이 필요할 때 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 있으면 그저 만족했다. ‘신용등급’ 이야기는 숱하게 들어봤지만 특별히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은행 대출금을 연체한 기억도 많지 않아 으레 ‘1∼2등급은 되겠지’라고 생각했다. 착각은 무참하게 깨졌다. 건실한 중견 건설업체를 다니는 강경진(가명·35)씨는 지난달에야 본인의 신용등급이 생각보다 무척 낮다는 걸 알았다. 입사동기 김종환(가명·34)씨와 A은행 지점을 찾아 1000만원 신용대출 상담을 받았는데 자신의 금리가 김씨보다 1% 포인트 이상 높게 나왔다. 강씨의 신용등급은 5등급인데 반해 김씨는 2등급이었다. 신용등급 격차는 대출금리로 고스란히 나타났다. 강씨의 대출금리는 연 8.5%인데 비해 김씨는 연 7.2%에 불과했다.
“함께 입사해 연봉이 같고, 나이도 비슷한데 대출금리 차이가 심하더군요. 몇 번 연체를 했는지 기억조차 잘 나지 않는데 그것 때문에 1% 포인트 이상 금리가 벌어진다니 당황스러웠습니다.”
강씨와 김씨의 소득수준은 거의 같다. 5년 전 함께 입사해 현재 받는 연봉은 둘 다 4000만원 정도다. 두 명 모두 주택담보대출로 1억원을 받았다.
차이는 ‘주거래 은행’과 ‘연체’였다. 김씨는 모든 금융거래를 A은행에서만 해왔다. 월급은 물론이고 적금과 카드까지 A은행과만 거래해 왔다. 반면 강씨는 월급이 A은행으로 입금될 뿐 하루가 지나지 않아 적금과 카드를 사용하는 B은행으로 모든 돈이 빠져나갔다. 주거래은행이 없는 셈이다. 강씨는 1000만∼2000만원으로 쪼개 4곳의 다른 시중은행에서 총 6000만원을 신용대출 받기도 했다. 여기에다 연체 기록이 신용등급에 치명타였다. 강씨는 잘 기억하지도 못했다. A은행에서 대출 받은 후 갚는 과정에서 7일 이내 연체가 총 3번 있었다. 다른 은행에서도 7일 이내 연체가 2차례 있었다. 모두 원금 상환이 아니라 이자 상환과정에서 생긴 일이었다.
연체 기록 때문에 신용등급이 나빠졌다는 말을 들은 강씨는 허탈했다. 별반 다를 바 없는 김씨보다 자신이 무려 3등급이나 낮아 금융거래에서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는 생각에 불쾌하기까지 했다. 강씨는 “큰 돈도 아니고 이자 몇 푼을 겨우 며칠 연체했다고 이런 식으로 신용등급을 낮추는 게 어딨느냐”며 “등급을 나누면서 사람을 차별하는데 지금이 양반·상놈 따지는 조선시대냐”고 울분을 토했다.
바야흐로 ‘금융계급’ 사회다. 신용등급은 돈으로 직결되고, 이는 곧 금융시장에서 개인은 물론 기업과 국가의 계급을 결정한다. 금융계급이 높으면 유리하다. 개인은 저금리로 목돈을 마련할 수 있다. 기업과 국가는 싼값에 자금을 쉽게 조달할 수 있다.
반대 상황은 비참하다. 개인은 신용등급에 따라 작게는 0.3% 포인트, 크게는 2% 포인트까지 대출 금리가 차이 난다. 1억원을 빌린다고 가정하면 연간 200만원에 이르는 이자를 더 낼지 덜 낼지가 신용등급으로 좌우된다. 신용등급 7등급 이하는 신용카드조차 만들 수 없다.
개인 신용등급의 경우 현재 나이스신용평가정보와 코리아크레딧뷰로(KCB) 두 곳에서 평가한다. 두 회사가 개인의 상환이력정보, 현재 부채수준, 신용거래 기간, 신용형태 정보 등을 기준으로 등급을 매긴다. 다만 평가방식이 서로 조금씩 달라 개인마다 신용등급이 다르게 산출되기도 한다. 은행별로 자체 기준에 따라 개인 신용등급을 재분류해 동일인이라도 신용등급이 다를 수 있다.금융회사마다 차이가 나지만 자신의 신용등급을 지키는 제1 계명은 언제나 ‘연체 관리’다. 아주 사소한 금액이라도 5일 이상 연체하면 치명타로 작용한다. 또 본인의 신용등급을 정확히 알고 대처하는 것이 중요하다.
시중은행 신용평가 담당자는 “신용카드 실적이 없을 경우 신용거래가 없는 것으로 간주돼 악영향을 줄 수 있으므로 카드를 아예 안 쓰기보다는 잘 쓰는 것이 중요하다”며 “급전이 필요하다고 대부업체를 이용하거나 카드 현금서비스 등을 이용하면 신용등급이 추락할 수 있는 만큼 늘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진삼열 기자 samu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