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등급, 불편한 진실] 부도위험·해외투자 바로미터… 회복은 ‘별따기’
입력 2012-09-21 18:30
국가 등급 쥐락펴락
신용등급이 세계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시대다. 신용평가는 국가의 전반적인 경제 상황과 위험도를 평가하는 데 쓰인다. 투자를 결정하고 해외 자금을 조달하는 일, 국가부도 위험 평가에 이르기까지 신용등급은 투자자들이 가장 믿을 수 있는 기준이 된다. 유럽발 재정위기에서 보듯 한 국가의 신용등급 강등은 촘촘히 연결된 국제 금융시장에서 엄청난 파급효과를 낳는다. 신용등급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독점적 권력을 가진 국제 신용평가사들에 대한 비판도 거세지고 있다.
2012년 8월 27일 오후. 기획재정부에서 예정에 없던 긴급 기자 브리핑이 이뤄졌다. 국제 신용평가사(신평사) 무디스(Moody’s)가 한국의 신용등급을 ‘더블A’급인 Aa3로 높인 결과 때문이었다. “한국이 뛰는 리그(league)가 달라졌다”며 등급 상향 의미를 설명하던 기획재정부 담당 국장의 목소리 톤은 평소보다 한층 높았다. 10여일 후인 지난 6일 저녁과 14일 오후엔 나머지 세계 3대 신평사 중 피치(Fitch)와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의 등급 상향 소식이 잇따라 전해졌다. 이번엔 기재부 차관보인 최종구 국제경제관리관이 마이크를 잡았다. 최 차관보는 “이로써 국제적으로 과거 외환위기로 인한 ‘낙인효과’를 완벽하게 탈피했다는 의미가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낙인효과. 그 단어 하나에 정부의 조금 과하다 싶은 ‘호들갑’의 이유가 깔려 있다. 1997년 11월 외환위기 이후 15년 가까이 쌓여 있던 아픔이다. 외환위기가 터진 그해 11월 직전까지 3대 신평사의 한국 신용등급 평가는 모두 ‘A’ 이상이었다. S&P와 피치의 등급은 심지어 ‘더블A’ 급이었다. 그러나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11월 21일을 기점으로 상황은 급전직하했다. 12월까지 한 달여 사이에 3대 신평사 모두 한국의 신용등급을 투자 위험이 크다는 투기등급(B레벨)으로 6∼12단계 강등시켰다. 비슷한 상태의 다른 아시아 국가에 비해 너무나 가혹했던 평가는 충격적인 결과로 이어졌다. 외국 자본은 썰물처럼 빠져나가 외환보유액이 바닥났고 한국 국채는 순식간에 정크본드(쓰레기채권)가 됐다. 그때의 평가는 ‘낙인’이 되어 2008년 금융위기 때까지도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다. 당시 국제금융국에서 일했던 한 정부 관계자는 “글로벌 금융위기 때 주요 외신들이 끊임없이 보도했던 한국경제 위기설은 악의적일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이처럼 한국은 국가 신용등급 강등과 승격의 암(暗)과 명(明)을 제대로, 절실하게 느껴본 나라다. 2000년대 우리 정부 경제 관료에게 신용등급 상향은 최우선 과제나 다름없었다. 기재부 고위 관계자는 “우리 정부가 신용 위상 회복에 목을 맬 수밖에 없었던 이유, 그리고 결국은 해낸 점은 인정해줘야 할 부분”이라고 말했다.
국가 신용등급에 울고 웃는 건 비단 우리나라만의 일은 아니다. 유로존 재정위기는 수많은 유사 사례를 낳았다. 4∼6월 3대 신평사로부터 연달아 신용등급을 강등당한 스페인은 결국 지난 6월 IMF에 은행권 구제금융 1000억 유로를 신청했다. 앞서 구제금융을 받았던 포르투갈은 구제금융 대가로 국민들의 반발을 받으며 긴축 조치를 시행하고 있지만 신용등급 회복은 아직 꿈도 꾸기 어려운 상태다.
글로벌 금융위기에 이어진 재정위기는 주요 선진국들의 신용등급도 불안한 저울대 위에 올려놨다. 지난해 8월 S&P의 미국 신용등급 강등은 전 세계 금융시장을 흔든 대 사건이었다. 미국의 트리플A(AAA) 등급이 70년 만에 무너진 사건으로 전 세계 증시는 폭락했고, 세계 경제 비관론은 빠르게 확산됐다. 프랑스 독일 스페인 정상은 통화 공조 방안을 논의해야 했다. 지난 1월에는 프랑스 신용등급도 AA+(S&P)로 한 단계 낮아졌다. 이는 유럽재정안정기금(EFSF)의 등급 강등으로까지 이어졌고, 유로존의 위기감은 한층 심화됐다. 이처럼 국가 신용등급은 한 나라 곳간은 물론 전 세계 경제를 뒤흔들 정도의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 그 힘은 부정적일 때 훨씬 강력하게 발휘돼 우리나라의 외환위기가 그러했듯 그 국가에 소속된 금융기관과 기업은 물론 그 속에 살고 있는 개개인의 삶도 직접적으로 힘겹게 할 수 있다.
특히 ‘한번 나빠지긴 쉬워도 회복은 어렵다’는 신용등급의 원칙은 개인뿐 아니라 국가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미 나빠질 대로 나빠진 유로존 국가 등에 대해서는 추가 신용등급 강등 경고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우리나라가 외환위기 전 수준의 등급을 회복하는 데 걸린 시간도 자그마치 15년이다.
조민영 기자 my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