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으로 유죄판결 받아도 “이사 선임 찬성”… 금융공룡 국민연금 의결권 행사 ‘거수기’
입력 2012-09-20 21:55
지난 3월 23일 오전 10시 열린 한화케미칼 정기주주총회에서 국민연금공단은 주요 주주로 참석해 ‘주주의 힘’을 보여줬다. 국민연금은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을 대표이사로 재선임하자는 안건에 반대표를 던졌다. 김 회장이 6개 계열사에서 임원직을 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은 ‘과도한 겸임으로 충실한 의무 수행이 어려운 자’에 대해 임원 선임을 반대하도록 의결권 세부지침을 정해 두고 있다.
하지만 같은 날 열린 롯데쇼핑의 정기주주총회에서는 정반대로 행동했다. 국민연금은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신영자 롯데장학재단 이사장의 이사 재선임 안건에 찬성표를 던졌다. 신 회장은 16개 계열사, 신 이사장은 12개 계열사에서 각각 임원으로 재직해 과도한 겸임이라고 볼 수 있는데도 제동을 걸지 않았다.
‘금융 공룡’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가 원칙 없이 제멋대로 이뤄지고 있다. 10대 그룹 93개 상장회사의 지분 4.14%를 보유하고 있는 막강한 주주인데도 감시자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이다.
20일 경제개혁연구소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2010년부터 올 상반기까지 자체 지침에 배치되거나 관계 법령에 어긋나는 ‘문제성 의결권’을 20번이나 행사했다. 국민연금은 주식 부당거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이사를 선임하자는 안건, 상법상 결격사유인 사외이사를 선임하자는 안건에 찬성표를 던졌다.
국민연금은 기업 가치를 떨어뜨려 주주 권익을 침해한 임원들의 선임을 애써 눈감았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2010년 SK C&C 이사로 선임될 때에도, 같은 해 조기행 SK건설 대표이사가 SK텔레콤 이사로 선임될 때에도 법원 판결과 관계없이 ‘거수기’ 역할만 했다.
지난 3월 하이닉스반도체 임시주주총회에서는 최 회장의 이사선임 건에 대해 반대 의견 없이 중립(Shadow Voting) 결정을 내렸다. 두산건설의 분식회계에 연루되었던 박용만 ㈜두산 회장이 2010년 3월에 대표이사로 재선임될 때에도 거수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겸직과다를 판단할 때 일관성이 없었다. 6∼9곳에서 임원을 겸직할 경우 ‘겸직과다’를 근거로 반대해 왔으면서도 대한항공 조양호 회장(9개 겸직), 하이트맥주 김지현 대표이사(7개), 현대백화점 경청호 대표이사(8개)의 경우에는 전례를 무시하고 이사 선임에 찬성했다.
사외이사 선임도 마찬가지다. 이사회 출석률, 재임 기간을 따져 의결권을 행사하도록 한 국민연금의 내부 기준은 유명무실했다. 국민연금은 사외이사의 경우 기존 임기와 향후 임기를 합쳐 10년을 초과할 때에는 선임 반대를 할 수 있게 하고 있다.
그러나 2010년 한진중공업 임우근 사외이사·감사위원을 선임하면서 내부 기준을 어겼다. CJ 신상구 감사위원은 임기 중 출석률이 53.5%에 불과해 연임 시 의결 기준(60% 이상)에 미달하는데도 반대하지 않았다.
강정민 경제개혁연구소 연구원은 “국민연금이 주주로서 원칙 있는 의결권을 행사해야 대기업의 지배구조가 투명하게 개선될 것”이라며 “겸직금지의 경우 5개 이상 계열사 임원 겸직금지 등으로 반대 의사결정 기준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경원 기자 neosar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