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그 가파른 시간 앞에 서서… 백가흠 장편소설 ‘나프탈렌’

입력 2012-09-20 18:27


소설가 백가흠(38)이 등단 12년 만에 낸 첫 장편 ‘나프탈렌’(현대문학)은 제목처럼 냄새만 남긴 채 기화되어 형체를 남기지 않는 우리 삶의 마지막 모습에 다가간다. 배경은 전주 근처 민공산에 있는 하늘수련원. 암 환자나 의탁할 데 없는 사람들이 살다가는 지상의 마지막 처소다. 삶은 너무도 모질긴 것이어서 이 마지막 처소에까지 평온이나 평화 같은 건 찾아오지 않는다.

소설엔 여러 사람들이 등장한다. 수련원 원장과 90세 노모, 관리자인 탈북자 출신 최영래, 폐암환자 이양자의 어머니 김덕이, 대학에서 정년퇴임한 시인 백용현과 조교 공민지, 그리고 수련원 축사 공사를 맡은 인부들…. 이들의 과거를 들추다보면 겹쳐지는 부분이 있다. 백가흠은 바로 이 지점을 극대화하여 소설의 중심을 잡는다.

폐암 말기 선고를 받기 직전 남편이 어린 제자와 바람을 핀 사실을 알게 된 이양자는 하늘수련원 황토방으로 들어오고 김덕이 여사는 자신의 몸이 망가져가는 줄도 모르고 딸을 위해 매일매일 동분서주한다. 혼자 몸으로 수련원을 경영해나가는 원장은 노망 난 노모를 모질게 대하지만 개울가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노모의 죽음을 겪은 뒤로 정신 줄을 놓아버린다. 혼란에 빠져든 수련원을 둘러싸고 금전 관계로 얽힌 최영래와 인부들은 걷잡을 수 없이 살인사건에 휘말리며 파국으로 치닫는다. 여기에 한국전쟁 때 겪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평생을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노년의 교수 백용현까지 가세하면서 소설은 수많은 가지를 거느린 ‘단편들의 용광로’로 변한다.

각각의 이야기는 현재와 과거가 겹치고 이곳과 저곳을 오가는 구조 속에서 서로 꼬리를 물며 죽음과 소멸을 동반하는 인생의 본질에 접근해 들어간다. “산 정상 근처에 오르자 하늘이 더욱 높아졌다. 숨이 가빴고, 어지럼증이 일었지만, 기분은 한결 나아졌다. (중략) 의사가 말한 대로 땅 끝에서 바다가 시작되고 있었다. ‘아, 이뻐라.’ 그녀의 얼굴에 자연스럽게 미소가 번졌다. 바다는 하늘색과 닮아 있었다. 멀리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희미한 경계를 바라보았다. 찬란한 햇빛이 부서져 내려, 그녀는 눈물을 조금 흘려보냈다.”(223쪽)

김덕이 여사의 이 눈물은 대체 한 많은 이 세상과의 화해일까, 연민일까. 각각의 사연과 상처들을 통해 인간의 보편적인 죽음과 소멸에 관해 이야기하는 소설은 비틀거리는 인간 군상에 관한 ‘나’의 이야기이자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