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훈의 현대시 산책 감각의 연금술] (32) 가족도감의 유전자… 시인 박후기
입력 2012-09-20 21:32
독특한 필명으로 후기(後記) 천착 … 시적 현장에 대한 인파이터 본능도
박후기(44). 본명 박홍희.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도두리에서 5남매 막내로 태어났다. 큰 형과 셋째 형이 중앙대 문예창작학과를 나온 터라 집안이 워낙 글 쓰는 분위기였다. 나이 차이도 꽤 나서 어렸을 때 ‘창작과비평’ ‘현대문학’ 등 문예지를 읽고 자랐다. 그의 신춘문예 도전기는 고교 때부터다. 서울예대 문창과에 진학했지만 서른 중반이 다 되어가도록 본심에만 올랐을 뿐, 등단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투고할 때마다 최종심에 오르내리니까, 누가 알아볼까봐 ‘후기(後氣)’라는 필명을 만들었다. 국어사전에 엄연히 ‘버티어나가는 힘’이라는 뜻이 적혀 있다. 그걸 ‘후기(後記)’로 잘못 알고 지금도 그를 ‘에필로그’라고 부르는 사람이 가끔 있다.
독특한 필명 덕분에 그는 가족사의 후기(後記)에 집착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는 갓 스무 살 시절에 아버지를 잃었다. 아버지는 미군 부대 격납고에서 떨어져 추락사했다. 믿기지 않았다. 믿고 싶지 않았다. 시인에게 아버지는 ‘늘 고맙고 착한사람’이었다. 자신은 물론 형제들에게도 매 한번 든 적 없었고, 없는 형편에 문학을 하겠다고 했을 때도 묵묵히 지지를 해줬다고 한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부채의식도 컸다. 아버지를 잃고 시를 쓰기 시작했으니 그가 살아온 과정엔 아버지가 깊숙이 자리한다. 아버지의 일터는 평택에 있는 ‘캠프 험프리’였다.
“전신주 위의 애자가 몸을 떨고 있네/ 기지촌에 비는 내리고/ 먼 데서 달려온 뜨거운 전기가/ 쉴 새 없이 애자의 몸을 핥고 지나갔네/ (중략)/ 깨진 애자의 젖은 몸이 길 위에 뒹굴고/ 미제 험비(군용차량)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불에 그을린 애자의 몸을 밟고 지나갔네”(‘애자의 슬픔’ 부분)
첫 시집 ‘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2006)에서 아버지만큼이나 두드러진 이미지가 있다면 바로 미군부대이다.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일하던 캠프 험프리에 몇 번 들어간 적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미국문화, 기지촌 문화를 접하면서 자랐다. 그때만 해도 그에게 미국은 아름다운 곳이었다. 미군이 우리나라에 오랫동안 있으면 우리나라도 이렇게 변할까, 하는 아주 단순한 생각도 했었다. 그러다 미군문제에 대해 눈뜨게 된 것은 고등학생 때이다. 우리 땅을 빌려 살고 있으면서 캠프 험프리의 주소를 미국 캘리포니아로 쓰고(실제로 미국 캘리포니아로 써야만 편지가 들어간다고 한다) 그들이 먹고 자는 돈이 우리 국방비에서 나오는걸 알게 되면서 그는 평택 미군기지 확장저지 운동인 대추리 투쟁에도 뛰어들었고 평택 지역 예술인들과 함께 ‘우리 땅 지키기 평택 문화예술인 모임’에도 참가했다.
이처럼 늘 현장 가까이에 있는 것은 그가 문학을 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하지만 시가 현장을 바로 담아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도 하다. 시는 구호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시적 대상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두 번째 시집 ‘내 귀는 거짓말을 사랑한다’(2009)는 첫 시집보다 서정성이 강화된 것은 물론 미학적 외연의 확장을 보여준다. 두 번째 시집을 펼치면 처음 만나게 되는 시가 있다.
“지도 깊숙한 곳,/ 마음 가장 깊은 곳에/ 미산이 있다/ 그곳은 강원도의 내면(內面),/ 미월(未月)의 사람들이/ 검은 쌀로 밥을 짓고/ 물살에 떠내려가는 달빛이/ 서어나무 소매를 적시는 곳/ 나는 갈 곳 몰라/ 불 꺼진 민박에 방을 얻고,/ 젊은 내외는 버릇없는 개를 타이르며/ 일찌감치 잠자리에 든다/ 멍든 개가 물고 간 신발을 찾아/ 어둠속을 뒤지는 밤,/ 미산에서는/ 좁은 개집에서도/ 으르렁거리며/ 푸른 별이 빛난다”(‘미산’ 전문)
박후기는 그동안 강한 이미지의 리얼리티를 붙잡고 살아온 것 같지만, 그의 천성은 동물성보다 식물성이 강하다. 그는 서서히 강원도의 내면을 닮은 자신을 보여주고 있다. 식물이 많이 살고 있는 강원도의 힘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