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책을 잘못 읽으면 양서도 악서된다… ‘가장 위험한 책’

입력 2012-09-20 18:11


가장 위험한 책/크리스토퍼 B. 크레브스/민음인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1848년 발표한 ‘공산당 선언’. 부르주아를 조롱하면서 프롤레타리아의 승리를 예견한 이 저작엔 전율할 문장이 넘쳐난다.

“지배계급들로 하여금 공산주의 혁명 앞에 벌벌 떨게 하라. 프롤레타리아가 잃을 것이라곤 쇠사슬뿐이요, 얻을 것은 세계이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공산당 선언’은 자본주의에 대한 통찰로 읽는 이들의 양심을 자극했다. 이후 인류가 전례 없는 갈등을 빚는 데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다. 인류는 ‘공산당선언’이 발표된 뒤 한 세기 넘게 냉전의 터널을 지나야 했으니까.

이처럼 글은 때론 세상을 뒤흔들고 예정된 역사를 뒤튼다. 흑인 노예들의 비참한 삶을 고발한 미국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1852년)은 남북 전쟁의 불씨가 됐고, 영국 소설가 살만 루슈디의 작품 ‘악마의 시’(1988년)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을 자극해 50명 넘는 테러 희생자를 냈다.

그런데 미국 하버드대 고전학 교수인 저자는 ‘가장 위험한 책’으로 ‘공산당 선언’도, ‘톰 아저씨의 오두막’도 아닌 우리에게 낯선 책 한 권을 꼽는다. 문제작은 로마 시대 역사가인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 저자는 무슨 이유에서 이 책을 ‘가장 위험한 책’에 선정했을까.

서기 98년 발표된 ‘게르마니아’는 고대 게르만족의 특성을 기술한 책이다. 게르만족의 기원과 생활 풍습을 서술하고 있다.

그런데 15세기 들어서면서 사람들이 ‘게르마니아’를 오독하기 시작했다. ‘게르만족은 단순하고 용감하며 충성스럽고 순수하며 정의롭고 명예롭다’고 묘사한 내용에서 일종의 인종주의적 영감을 얻은 것이다. 프랑스 계몽주의자 몽테스키외는 ‘법의 정신’에서 ‘게르마니아’의 일부 구절을 이유로 게르만족의 우수성을 역설하고 나섰다. 프랑스 민족학자 고비노의 ‘인종불평등론’, 독일 작곡가 바그너가 벌인 국수주의 운동에도 ‘게르마니아’는 이론적 발판이 됐다.

가장 큰 문제는 20세기에 발생했다. 영국이나 프랑스 등 이웃 국가에 비해 근사한 역사를 갖지 못한 독일인들이 ‘게르마니아’에서 ‘독일 역사의 새벽’을 억지로 끌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독일인들은 ‘게르마니아’에서 자신들의 기원과 조상을 찾았다. 나아가 독일의 민족 지상주의를 선전하고 인종차별을 타당시하는 도구로 활용했다. ‘게르마니아’가 급기야 나치의 일그러진 세계관을 뒷받침하는 선전물로 전락한 것이다.

그런데 수많은 문헌을 조사해 ‘게르마니아’의 기원을 좇은 저자는 책을 쓴 타키투스에 대해 이 같이 말한다. “(타키투스는) 라인강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민족지학 저자들에 의지하여, 로마의 정세를 염두에 둔 채 그저 가끔 북부의 현실을 곁눈질해 가며 이 작품을 썼다. 독일의 민족성을 정의하는 데 원용한 이 텍스트가 실은 한 로마인이 쓴 인간의 미덕에 대한 상상의 소산이자 정치적 발언이었던 셈이다.”(21쪽)

즉, ‘게르마니아’를 둘러싼 인류의 수백 년에 걸친 소동은 인간의 욕망이 보잘 것 없는 글도 오독할 경우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이시은 옮김.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