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사의 풍경-백석의 만주 유랑과 해방정국] (1) 신경시 동삼마로 35번지 황씨 방(方)

입력 2012-09-20 18:11


‘거처 찾아’ 북방 헤매던 백석

그만의 ‘언어로 된 집’ 짓다


“이 부엌간을 지나서 그 맞은편에 토굴 같은 방이 있으니 이것이 바로 나의 거처다. 나는 언제나 이렇게 부엌간을 지나는 것과 그 부엌간에서 욱덕거리는 여자들의 엉둥이에 스치지 않으면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지금도 불쾌하다. (중략) ‘그래서 어쨌든 집을 찾어야겠다.’ 이것은 백석의 말이다.” 이갑기가 1940년 4월16일부터 4월23일까지 5회에 걸쳐 당시 신경(중국 창춘의 옛 지명)에서 발간되던 한글신문 ‘만선일보’에 기고한 ‘심가기(尋家記·집을 찾는 기록)’에는 이주 조선인들의 생활고가 잘 나타나 있다. 백석이 1936년 조선일보사를 그만 둘 즈음 편집국 촉탁사원으로 입사했던 이갑기는 1939년 하반기에 신경으로 왔다.

만주국 성립 이전에 신경은 몽골8기 궈어뤄스치(郭爾罷斯旗) 소속의 작은 진(鎭)이었으며 인구는 8만 명에 불과했다. 그러다 일본 관동군이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중국 동북지역을 점령한 것은 1931년 9월 18일의 일이다. 일본은 신경을 수도로 삼아 만주국 황제로 푸의(溥儀)를 앉힌 후 섭정을 시작했다. 만주는 원래 청나라 지배층인 만주족이 활동하던 곳으로, 청나라 황실의 고향이니만큼 일본 입장에선 푸의야말로 만주국의 ‘얼굴마담’으로 아주 제격이었다. 일본은 만주국을 대륙침략의 거점으로 삼기 위해 대신경도시계획까지 만들어 국도(國都)건설에 재정을 쏟아부었다. 1940년 신경시 인구는 약 55만5000명. 이 가운데 조선인은 1만6000명(3%), 일본인은 약 11만 명(20%)이었다.

당시 신경을 찾았던 소설가 이태준은 이렇게 묘사했다. “저녁 여섯 시가 지나서 신경에 나었다. 역을 나서니 바람이 씽씽 귀를 치는데 광장에서 방사선으로 뻗어나간 길들은 끝이 모다 어스럼한 저녁으로 사라졌다. 한것이고 새 것이고 삘딩들은 비인 것처럼 꺼시시하다. (중략) 정면으로 제일 큰 길을 달려가는데 모다 애스팔트, 언덕이 진 데는 두부모같은 돌로 파문을 그려 깔았다.”(‘무서록’<1941>)

도시 건설이 한창이던 1940년, 백석은 신경에 발을 디딘 직후 친구 이갑기와 함께 방 하나를 썼는데 가히 토굴 같은 집이었다. “방은 한 평은 되리라. 나의 키가 오척판촌 될 듯 말 듯 한 것이 어느 편으로 누어도 겨우 발은 뻗칠 수 있으니 그러나 이런 곳에도 나 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야 한 사람이면 그대로 못견딜 것은 아니라 한 평이 못되는 곳에 사람이 두 사람이 거처를 한다.”(이갑기 ‘심가기<尋家記>’)

하지만 백석은 몇 달 뒤 이 방에서 나와 신경시 북쪽에 위치한 관성자(寬城子·지금의 寬城區) 구역으로 거처를 옮긴다. 비좁아 터진 방 때문만이 아니었다. 당시 관성자는 러시아 10월 혁명을 피해 신경으로 건너온 백계 러시아인들이 큰 마을을 이루며 살고 있었다. 일본 청산학원 영어사범과에 재학할 당시 러시아어를 배웠던 백석은 차제에 관성자로 거처를 옮겨 러시아어를 완벽하게 배워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해 3월부터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에서 근무하게 된 백석의 업무는 측량 보조원이었다. 당시 국무원은 대(大)신경 건설을 위해 러시아인 측량사를 고용하고 있었기에 러시아어에 능통한 백석을 특채했을 가능성이 높다. 대학 시절에 이어 함흥영생고보 교사 시절에도 틈나는 대로 러시아인을 찾아다니면 러시아어를 배웠다지만 통역을 직업으로 삼은 만큼 러시아어에 통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당시 ‘만선일보’에서 일하던 소설가 안수길은 이렇게 증언했다. “시인 백기행(백석의 본명)도 신경에 와 있었다. 백씨가 어디 직장을 갖고 있었는지 지금 소상치 않으나 백계 러시아인한테서 노어 공부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나와 용정 신경시대’)

관성자로 거처를 옮긴 또 다른 이유는 자신이 살고 있는 동삼마로 건너편의 서칠마로(西七馬路)에 살고 있는 돈푼깨나 있는 조선인이 세 치 혀를 함부로 놀린데 대해 염증을 느꼈기 때문이다. 백석은 1940년 5월 25∼26일 ‘만선일보’의 ‘일가언’ 코너에 ‘조선인과 요설’이라는 글을 발표한다. 조선인의 말 많음을 공략한 글로, 부제는 ‘서칠마로(西七馬路) 단상의 하나’였다. “조선인의 요설을 나는 안다. 그것은 고요히 생각할 줄을 모르는 것이다. 생각하기 싫어하는 것이다. 가슴에 무서운 긴장이나 흥분이 없는 것이다. 또 무엇인가 비애를 가슴에 지닐 줄 모른 것이다. 조선인에게는 이렇게 비애와 적막이 없을 것인가. 분노가 없을 것인가. 조선인은 이렇게 긴장과 흥분을 모르는 것인가. 그리고 생각하는 것까지도 잊어버린 것인가. 멸망의 구극(究極)을 생각하면 그것은 무감(無感)한 데 있을 것이다.”

당시 만주의 일부 조선인들은 만주인들로부터 얼꾸즈(二狗子)라는 욕을 먹고 있었다. 만주까지 쫓겨온 식민지 백성인 처지에 일본인에게 아부하고 중국인들을 하대하며 요설을 풀어놓는 ‘개보다 못한 인간’이라는 뜻이었다. 당시 조선인 중상층은 매지정(梅枝町) 등 조일통(朝日通) 일본영사관 부근에 주로 거주한 반면 조선인 하층은 일본인이 거의 거주하지 않는 관성자, 팔리보(八里堡) 등 외곽지역에 거주했다.

백석의 대쪽같은 성격은 ‘백석’이라는 이름으로는 일제의 지원을 받는 ‘만선일보’에 시를 발표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당시 조선매일신문사 신경 특파원 겸 재만 선계(鮮係) 평론가인 고재기는 ‘재만조선인 문학’이라는 글에서 백석에 대해 “시집(사슴)을 펴낸 중견시인이지만 현재 거의 시를 쓰지 않다시피하고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백석은 비록 만주에 거주하고 있었으나 자신의 모든 시 작품을 조선 국내 문학잡지에 발표했던 것이다.

관성자 러시아마을에 머물며 러시아어를 배우던 그는 근무지인 국무원 경제부에 출근하는데 많은 애로가 따르자 다시 동삼마로 근처 국도의원 2층으로 옮겨온다. 병원은 작은 2층 건물이었고 주인은 백석의 오산고보 동창생 김승엽이었다. 그러나 김승엽이 병원을 정리하고 곧 동경으로 유학을 떠났기 때문에 이곳에 머문 기간은 몇 달밖에 되지 않았다. “어쨌든 집을 찾아어겠어”라고 되뇌이곤 하던 백석은 동삼마로 35번지 시영주택, 관성자 러시아인 마을, 국도의원을 전전했을 뿐, 결국 나라 잃은 식민지 백성이 그렇듯 집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재만 문인이던 박팔양이 1940년 5월 신경에서 낸 시집 ‘여수시초’ 출간기념회에 발기인으로 참석한 것 등을 제외하고 재만 조선인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었던 백석은 틈나는 대로 토마스 하디의 ‘테스’ 번역에 몰두한다. 그리고 그해 9월 번역본 ‘테스’를 조광사에서 발간하기 위해 경성을 들렀다가 도쿄까지 다녀간다.

백석의 영생고보 제자 이현원의 증언이다. “어느 날이었다. 내가 청산학원에 입학해서 다니는 1940년에 갑자기 백석 선생님이 우리 강의실에 들어왔다. 마침 그 시간은 수업 중 쉬는 시간이었다. 깜짝 놀라 다시 보니 홈스판 양복을 멋지게 차려입고 성큼성큼 학생들을 헤치고 내 앞으로 다가와 ‘정문에서 기다릴테니 수업 끝나는대로 오라’는 이야기를 하고는 바로 나가셨다. (중략) ‘선생님 어떻게 오셨습니까?’ 하고 묻자 ‘나 이번에 ‘모던 일본’ 잡지사의 마해송씨를 만나러 왔다. 마해송씨가 자꾸 같이 동경에서 일할 수 없겠는가 하며 ‘모던 일본’ 잡지사에 근무하자며 하도 조르는 터에 상담차 왔다’고 말했다.”

백석은 마해송씨가 편집책임자로 있던 ‘모던 일본’에 취직하지 않고 다시 경성을 거쳐 만주로 돌아간다. 당시 대부분의 번역서가 일본서를 다시 번역한 중역이었는데 반해 1940년 9월20일 경성 조광사에서 펴낸 번역본 ‘테스’는 백석이 영어 원본을 완역한 것이다. 578쪽에 달하는 두꺼운 부피의 이 책은 만주에서 백석이 성취한 야심적인 기획이었다. 낮에는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의 통역으로, 밤에는 관성자에서 러시아어 습득에 매진하던 그가 시간을 쪼개 ‘테스’까지 완역했으니 백석이 찾고자 했던 집은 결국 ‘언어의 집’이었던 것이다. 지상의 거처는 모두 스러지고 만다. 오로지 언어만이 결코 스러지지 않는 유일한 집이다. 집도 없이 셋방을 전전하던 백석의 모습이 70여년이 지난 창춘 거리의 인파 속에서 섞여 있는 것만 같았다. 문인이라면 모두 언어의 집을 짓겠지만 백석처럼 러시아어와 일어,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 쓰면서도 관북 사투리를 중심으로 한 우리말을 그토록 아름답고 높고 쓸쓸하게 지켜낸 사람은 찾아볼 수 없다. 백석은 언어 자체에 쫓기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만주에 와서 그만의 언어로 된 집을 지어냈던 것이다.

중국 창춘=글 사진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