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인류의 젖줄 밀크, 묘약인가 독약인가… ‘밀크의 지구사’

입력 2012-09-20 18:26


밀크의 지구사/해나 벨튼/휴머니스트

밀크(milk) 하면 떠오르는 추억이나 이미지는? 1970년대 학교에서 흰 우유를 배급받던 시절을 회상하는 이도 있을 것이고, 분유 광고에 나온 잘 생긴 우량아를 기억하는 이도 있을 것이며, 방울을 떨어뜨렸을 때 튀어 오르며 생겨나는 왕관 모양을 머릿속에 그리는 이도 있을 것이다. 인류는 기원전 7000년부터 가축의 젖을 먹기 시작했다. 밀크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이자 지구의 역사다.

한국 중국 일본 등에서는 밀크를 ‘우유(牛乳)’로 번역하지만 인류가 목축을 시작하면서 마시기 시작한 동물의 젖에는 소젖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밀크는 양젖 염소젖 말젖 야크젖 낙타젖 순록젖 당나귀젖 등 인류가 가축으로 키운 포유동물의 젖 모두를 일컫는다. 밀크는 아프리카와 서아시아에서 식량과 물이 귀한 시기에 생존을 위한 필수품이었다.

80% 이상 물로 이뤄져 있는 밀크는 칼슘과 라이신, 그리고 비타민D 등 다양한 영양소를 제공해주었다. 그러나 모든 인류가 동물의 젖을 좋아한 것은 아니다. 세계 인구의 75%가량이 생유(生乳)를 소화시키지 못한다. 또한 포유동물 대부분은 풀이 풍부한 계절에 새끼를 낳기 때문에 봄과 여름에 젖 분비기가 몰려 계절별로 밀크 생산량의 변동이 심하고 부패하기도 쉽다.

동물의 젖을 주로 마셨던 유목민들은 생유를 발효시켜 치즈 또는 알코올성 요구르트 음료로 마시거나 끓여 먹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는 생유를 즐기지 않았던 문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대부분의 밀크가 마을과 도시 밖 목장에서 생산돼 신선도를 유지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밀크를 야만인과 교양 없고 촌스러운 유목민이나 먹는 음식이라고 비하한 까닭이기도 했다.

몽골에서는 해마다 처음 말젖을 짜는 날을 축하하기 위해 축제를 연다. 말젖은 설사를 일으키기 때문에 그냥 마시지는 않는다. 기원전 1세기에 학자 마르쿠스 바로가 쓴 ‘농업론’에도 이러한 부작용이 기록돼 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신선한 말젖을 가죽 주머니에 넣고 큰 막대기로 젓는다. 3일쯤 지나면 말젖이 시큼해지면서 발효식품이 된다. 몽골인들이 즐겨 마시는 아이락의 유래다.

그렇다면 자연의 완전식품이자 인간 생명의 젖줄인 밀크는 묘약인가 독약인가. 밀크는 예부터 음식과 음료일 뿐 아니라 신비롭고 귀중한 존재였다. 순수한 이미지로 인해 신의 음료로 여겨졌으며, 병든 이를 고치는 약으로도 숭배되는 등 ‘하얀 묘약’으로 칭송받았다. 밀크는 오래전부터 치료제 역할을 했다. 해독제부터 피부 가려움증 억제제, 눈연고, 결핵 치료 등에 사용됐다.

하지만 지저분한 환경에서 키운 소는 질병에 걸리는 경우가 많았고, 이런 소에게서 짠 젖은, 비위생적인 운송과정을 거쳐 냉장도 하지 않은 채 저장됐기 때문에 질병과 사망의 주원인이었다. 양조장 지게미를 먹여 키운 소의 쓰레기 우유, 밀가루와 분필 등을 섞은 가짜 우유, 표백 우유 등으로 인해 밀크는 더럽고 해로운 ‘하얀 독약’이라는 딱지가 붙었다.

영국 출신의 프리랜서 작가이자 언론인인 저자는 ‘묘약’에서 ‘독약’이 된 밀크의 역사와 이면을 각종 에피소드와 사진 자료를 곁들이며 들려준다. 젖먹이를 둔 어머니들을 산업혁명의 현장으로 내몰기 위해 모유 대신 불량 우유를 먹게 한 ‘우유와 어머니의 관계사’, 건강 유지의 필수 음료가 된 우유의 이미지를 통해 만들어진 ‘영양의 식민화’ 등 이슈들을 촘촘하게 살펴본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진다. 저온 또는 고온에서 깨끗하게 박테리아를 멸균하고 몸에 나쁜 지방을 제거해 가공한 현대의 우유는 ‘묘약’인 것일까? 이제 ‘우유 문제’는 다 해결된 것일까? 우리가 마시는 가공 우유는 진짜 우유일까? 서구 유럽에서는 우유 소비가 줄어들고 있는 반면 아시아에서는 왜 소비량이 늘어나고 있는 것일까?

이 책의 감수를 맡은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말미에 ‘한국 우유의 20세기사’를 소개한다. 일제강점기 우유 정책과 해방 이후의 우량아 선발대회 등 사연들을 읽다 보면 어린 시절 마시던 우유 한 잔에 얽힌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또한 저지방, 무가당, 유산균, 무기질, DHA 강화 등 시중에 널려 있는 그 많은 우유들이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강경이 옮김.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