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텔’ 사이사이로 예술 흐르고… 情 흐르고… 부산 감천문화마을 풍경
입력 2012-09-19 21:42
부산을 소재로 한 대중가요 가운데 남인수가 부른 ‘이별의 부산정거장’ 만큼 심금을 울리는 노래도 없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밀리고 밀려 더는 갈 곳 없던 피난민들은 부산의 가파른 산비탈에 터를 잡았다. 3년에 걸친 전쟁이 끝난 후, 대부분의 피난민들은 ‘한 많은 피난살이 설움도 많아 그래도 잊지 못할 판잣집이여’를 흥얼거리며 고향으로 가는 완행열차에 올랐다. 일부는 남아 부산을 제2의 고향으로 삼았다. 세월이 흐르며 산비탈 판자촌은 대부분 아파트촌으로 변했다. 하지만 사하구 감천동의 감천마을은 시계바늘이 멈춘 듯 아직도 달동네 그대로 남아있다.
성냥갑을 닮은 파스텔 톤의 집 4000여 채가 산비탈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감천마을의 풍경은 어찌보면 이국적이다. 그래서 ‘한국의 산토리니’ 혹은 ‘한국의 마추픽추’로 불린다. 창문을 열면 앞집 옥상 너머로 시리도록 푸른 감천항이 에게해처럼 한눈에 들어오고 고개를 돌리면 옥녀봉과 천마산 봉우리가 안데스 산맥처럼 버티고 있다.
하지만 막상 동네 안으로 걸어 들어 가보면, 한 사람이 지나가기도 힘들 정도로 비좁고 가파른 골목길은 낭만적 수식어와는 거리가 멀다. 수명을 다한 시멘트벽은 쩍쩍 갈라져 빙하의 크레바스를 연상시킨다. 낡은 시멘트 계단은 밟으면 풀썩 내려앉을 것 같아 발걸음이 조심스럽다. 더 이상 이사 올 사람이 없어 빈집은 나날이 늘어만 가고 달동네에서 한평생을 산 늙은이들은 옥수수대궁처럼 여위어 가고 있다.
이런 마을에 그나마 ‘희망’이라는 단어가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 것은 2009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주최한 ‘마을미술 프로젝트’에 선정되면서부터. 산 중턱을 지나는 산복도로에 주민과 작가들이 만든 미술품이 설치되자 관광객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2010년에는 ‘미로미로(迷路迷路) 골목길 프로젝트’가 시작되면서 테마가 있는 집이 들어서고 골목길 곳곳에 벽화와 조형물이 들어섰다. 그리고 마을 이름도 감천문화마을로 바뀌었다.
감천마을 투어는 서구 아미동과 사하구 감천동을 잇는 반달고개에서 시작된다. 달동네 아이들이 다니는 감정초등학교 담장에는 세계 각국의 국기와 함께 아이들의 얼굴과 손바닥이 프린트되어 동심을 노래한다. 보슬비가 내리는 아침에 우산을 쓰고 등교하는 감천마을 아이들의 해맑은 얼굴이 파스텔 톤의 마을 풍경과 어우러져 한 폭의 수채화를 그린다.
아미성당 아래에 위치한 감천마을 입구에서 마을정보센터인 ‘하늘마루’까지 이어지는 산복도로에는 10여 개에 이르는 작품이 설치되어 눈길을 끈다. 건물 옥상에 설치된 전영진 작가의 ‘사람 그리고 새’를 비롯해 주민들의 희망 메시지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달콤한 민들레의 속삭임’ 등이 그것이다.
감천마을의 속살을 제대로 보려면 건물 벽에 골목 풍경을 거울에 반사된 형태로 그린 나인주 작가의 ‘마주보다’ 작품 앞 골목길에서 출발하는 화살표를 따라가야 한다. 행여 거미줄처럼 연결된 미로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화살표는 방향이 바뀔 때마다 나타나 친절을 베푼다. 골목에서 마주치는 주민들도 팍팍한 삶 탓에 짜증이라도 날 법하지만 관광객에게는 ‘친절한 화살표’로 돌변한다.
감천마을에는 아직도 새벽마다 제첩국 수레를 끄는 아낙이 “재첩국 사이소”를 외치는 등 잊고 살았던 정겨운 삶의 소리가 남아있다. 말싸움하는 것처럼 들리는 부산 아낙들의 억센 사투리와 마당이나 다름없는 앞집 옥상과 옆집 옥상 사이를 ‘날아 다니는’ 아이들의 재잘거림도 정겹기는 마찬가지다.
감천마을 사람들은 한 뼘의 땅이라도 그냥 놀리는 법이 없다. 시멘트로 포장돼 흙 한 줌 없는 골목길에는 집집마다 화분이 가지런하게 놓여있다. 상추, 고추 등 채소를 심은 화분은 푸른색 물탱크가 인상적인 옥상 공간도 빼곡하게 채우고 있다. 이른 아침에는 화분 텃밭에서 딴 고추를 넣고 끓인 된장찌개의 구수한 냄새가 골목길을 흘러 다닌다.
화살표로 그린 나무벽화가 인상적인 ‘희망의 나무’ 옆 정우네 슈퍼는 26세에 김천서 시집와서 30년 넘게 살고 있다는 강노미(59)씨의 보금자리이자 생활터전. “20평 남짓한 좁은 건물이지만 가게와 방 2개, 부엌, 화장실, 목욕탕 등 있을 것은 다 있다”는 강씨는 문화마을로 바뀐 후 찾아오는 관광객들로 인해 매상이 늘었다며 넉넉한 웃음을 짓는다.
감천마을에는 지금은 사용하지 않지만 공동우물 등 추억의 장소들도 그대로 남아 있다. 우물 주변의 공터는 아침저녁으로 물동이들이 장사진을 이루던 곳. 물이 귀한 감천마을에서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물지게 양쪽에 물동이를 하나씩 걸고 가파른 산비탈을 오르내렸다. 지금은 관광객들을 위한 화장실로 바뀌었지만 감천마을 주민들은 옛날에 공동화장실을 이용했다. 발을 동동거리며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다 실례하는 웃지 못 할 사건도 다반사. 감천마을 주민들이 공유하는 추억은 이제 벽화로 남아 골목길을 지키고 있다.
느리기는 하지만 감천마을도 이렇게 조금씩 변하고 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은 마을 사람들의 넉넉한 정이다. 바닷바람과 산바람이 만나는 시원한 골목에 돗자리를 깔거나 쪼그리고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다보면, 이웃의 아픔은 나의 아픔이 되고 나의 기쁨은 이웃의 기쁨이 된다. 고달파서 더 인간적이고 허름해서 더 아름다운 감천마을을 사람들이 찾는 이유다.
부산=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