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임항] 도로의 정치경제학

입력 2012-09-19 18:55


지난 8월 중순 주말 오대산 가는 길에 막국수를 먹으러 일부러 춘천을 들렀다. 늦은 점심을 먹고 나서 목적지에 빨리 가려면 영동고속도로로 가는 게 당연한데 갑자기 국도로 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지도를 보니 춘천∼양양 간 56번 국도가 지름길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국도로 접어들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과거에 다녔던 기억과 너무 다른 도로변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우선 화장실을 찾을 수 없다. 휴게소는 모두 흉가가 돼 버렸고, 그나마 외지인이 사들였는지 차나 사람이 들어올 수 없게 울타리를 쳐 놓았다. 음식점 간판은 글자가 떨어져 나갔거나 알아볼 수 없게 빛이 바랬다. 한때 영화를 누렸던 큰 휴게소 터도 썰렁하게 비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주말인데도 지나가는 차는 거의 없었다. 철원에서 시작되는 56번 국도는 춘천 구성포에서 솔재터널을 지나 홍천군의 서석면, 내면 율전리, 창촌리를 거쳐 삼봉휴양림, 구룡령, 미천골 휴양림으로 이어진다. 31번 국도로 갈아타고 오대산으로 갈 수도 있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이따금씩 가던 곳들이다.

그 10년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영동고속도로가 확장됐고, 양평∼인제 간 44번 국도가 4차로로 직선화됐다. 44번 국도가 막히면 56번 국도로 우회하곤 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도 거의 없다. 행락객들은 이제 넓어진 길을 따라 서울에서 설악산이나 속초, 양양까지 2시간반이면 가 버린다. 예전처럼 다른 경승지를 들렀다 가거나 가다가 해 저물면 약수터 근처에 묵지 않는다.

어디 56번 국도뿐일까. 춘천∼원주∼충주∼이화령에 이르는 3번·19번 국도 등도 그렇다. 중소규모 관광지도 마찬가지다. 언제부턴가 관광객들은 워터파크와 놀이시설 등 대규모 위락시설을 갖춘 곳에만 몰린다. 도로망이 발달하면서 중소도시는 스쳐 지나가는 곳으로 전락했다. 관광지에 머무르는 시간도 짧아지고, 잠은 대도시에서 잔다. 이처럼 몰락한 관광도시 가운데 온천으로 유명한 수안보. 소백산과 남한강이 빚은 8경을 자랑하던 단양을 들 수 있다.

내가 지금도 자주 찾는 이들 관광지는 보기에 안쓰러울 정도로 몰락했다. 무조건 편리한 것, 큰 것, 빠른 것, 화려한 것을 추구하는 세태가 이런 변화를 불러 왔다고 볼 수도 있다. 해당 도시가 관광객의 기호 변화에 맞춰 변신과 리모델링을 게을리한 탓도 있을 것이다. 그보다는 도로망이 좋아지면 사람도, 돈도 도로 끝의 대도시로 빨려들어간다는 ‘빨대효과’ 탓이 클 것이다. 뒤집어 보면 문제는 정부가 도로에 대한 과잉투자를 통해 관광지 간 양극화를 부추긴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고속도로나 국도 확장과 터널화 등에 따라 상권이 몰락한 옛 도로변 주민들은 어떻게 됐을까. 대규모 도로사업에 따른 환경영향평가에는 생존권 박탈에 해당되는 이런 사회·경제적 변화도 반영돼야 하는 게 아닐까. 환경부 관계자는 이에 대해 “환경영향평가 전체 과정에는 이런 상권 변화도 고려하도록 돼 있으나 거기까지 여력이 미치지 못하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는 “도로공사에서 일부 민원 사례에 대해 비공식적 보상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환경정책·평가연구원 이수재 연구위원은 “사전협의 단계 또는 환경영향평가 초안 단계에서 옛 도로 주변 주민들에게도 사업계획을 공시해야 한다고 본다”고 말했다.

게다가 56번 국도와 44번 국도 구간 일부에서는 동홍천∼양양 간 고속국도가 한창 건설 중이다. 모두 71.7㎞의 노선에 2조7100억원이 투입되는 이 도로는 기존 영동고속도로, 44번 국도, 서울∼양양 간 항공노선 등과의 중복투자, 과잉투자 논란을 낳았다. 전체 구간의 73%가 터널과 교량인 이 고속도로가 완공되면 강원도 국도 주변은 물론 강원도민 대부분의 삶이 어떻게 변할까.

임항 환경전문기자 hngl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