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해영 (12) 토플시험도 안보고 미국 유학을 오시다니요?

입력 2012-09-17 17:58


문제는 바로 모든 일이 잘 돼 간다는 데 있었다.

학교는 각자의 자리에서 제 몫을 하는 하나의 조직체가 되고 난 이후 저절로 굴러갔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런데 이는 내 영혼에 위기를 가져왔다. 학교일은 내게 더 이상 도전과 열정을 주지 못했다. 처음 학교의 책임자가 됐을 때 주님의 은혜를 바라는 뜨거운 열정과 간절함이 안일한 일상에 묻혀버렸다. 그러자 ‘앗 뜨거워라! 여길 떠나야겠구나’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 위기감은 10여 년간 학교를 운영한 경험을 토대로 전문교육을 받고 싶다는 갈망으로 바뀌었다. 학교사역 3년 이후 후임에게 인계하고 2003년 12월 마지막 학기를 끝으로 보츠와나를 떠났다.

내가 한국에서 보츠와나로 갈 때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 그곳에 가지 않으면 허망하게 죽을 것 같은 위기감을 느꼈고, 주님에게 사랑의 빚을 갚는다는 의미가 있었다. 물론 그 길은 불확실한 길이었다. 그 곳에서 나는 직업학교 교장이 되는 기회를 가졌다. 하지만 보츠와나에서 미국으로 옮길 때는 전적인 내 결정이었다. 안일한 일상을 거부하고 도전해 보다 나은 인생을 만들기 위해 미국으로 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라는 기회 앞에는 위기가 먼저 와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인생의 전환점에 서게 됐지만 내 앞은 이전의 아프리카보다 더 불투명했다.

낼 모레면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내 미래를 보고 투자해 주세요’라고 주변에 청하거나 새로운 시도를 하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처럼 보였다.

“김 선교사님, 공부하러 왔다고 하시는데, 무슨 계획이라도 있습니까.”

미주그루터기선교부의 김진홍 목사님이 물었다.

“뭐 별다른 대책은 없습니다,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있으세요?”

보츠와나를 떠나 미국 뉴욕의 대표적인 한인타운 후러싱에 도착했다. 내 목적은 미국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해 전문가가 되는 것이었다. 미국은 시카고 한인선교대회 참석과 선교보고를 위해 이미 여러 번 선교사로서 방문했던 나라다. 하지만 교회에 ‘미국에 공부하러 왔으니 도와주세요’라고 말하긴 쉽지 않았다. 일단 시기가 맞지 않았다. 이젠 선교사가 아닌 유학생이니 입장이 달라진 것이다. 김 목사님을 비롯해 만나는 사람마다 무슨 대책이 있느냐고 물었지만 모두 도움을 줄 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물어봐 주는 것만도 고마운 일이었다.

별다른 대안이 없는 상태에서 김 목사님의 추천으로 나약대학교에 입학원서를 냈다. 어쩌면 나는 매우 무모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미국 대학교에 입학하려는 사람이 그동안 토플시험도 안 봤다니. 보츠와나에서 영어를 쓰면서 생활했지만 정식으로 영어과정을 단 한 번도 밟아 본 적 없다. 이는 영어뿐이 아니다. 중·고등학교 과정을 모두 검정고시로 끝냈으니 당연히 기초학문에 대한 실력이 부족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람이 미국의 대학교에 공부하겠다고 하는 건, 정말 말도 안 된다고 할 수 있다. 내 계획을 듣고 주변에서 ‘그렇게 대책도 없이 옵니까’ ‘공부할 형편이 안 되는군요’라고 나무라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사람들에게 일체의 도움을 기대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눈앞에 닥친 현실은 생각보다 냉혹했다. 먹고 자고 공부하는 데 아무런 대책이 없이 자본주의 미국사회에서 살겠다는 발상은 무모함을 너머 만용이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욱 아프리카 오지에서 살다 온 내가 한순간에 세계 최고의 도시 뉴욕에 섰다. 좋게 말하면 도전이지만 실상은 어리석고 한심해 보이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어리석은 일일까. 인생사는 예측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의 일은 더 알 수가 없는 법인 듯하다.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이 가능하게 변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