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양기호] 아데나워와 요시다

입력 2012-09-16 20:17


요즘 일본 매스컴은 영토, 영토, 영토이다. 시내 서점마다 영토문제를 다룬 책들이 진열되어 있다. 일본은 러시아와 북방영토 4개 섬, 중국과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한국과 독도문제로 영유권분쟁을 벌이고 있다. 공통점은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섬을 두고 주변국과 갈등을 벌이고 있다는 점이다.

영토문제는 전후 처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일본은 제국주의 시절 주변도서를 전리품으로 챙겼다. 센카쿠열도는 청·일전쟁 후, 북방영토와 독도는 러·일전쟁 후 부당하게 편입시켰다. 지도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지만 센카쿠열도는 대만에, 독도는 울릉도에 훨씬 가깝다. 북방 4개 섬도 홋카이도에서 떨어져 있다. 그나마 오키나와나 홋카이도는 근대 이후 일본이 정식으로 영토화한 지역이다.

2차대전 패전 후 일본영토는 포츠담선언에서 혼슈 등 4개 섬으로 줄어들었다. 대만, 조선, 사할린 등 구식민지는 모두 독립하거나 반환되었다. 그러나 북방 4개 섬과 센카쿠열도 영유권은 애매한 상태로 남았다. 일본은 이들 영토를 복귀시킬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에서 일본은 강력한 로비를 통하여 구영토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가장 앞장선 사람이 전후 보수체제를 만들어낸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전 총리였다.

요시다 총리는 원래 외무성 관료 출신이다. 전쟁에서 졌지만 외교전에서 승리를 목표로 하였다. 결국 일본과 주변국 간 갈등을 조장하려는 미국 의도와 일본의 대미(對美) 로비가 맞아떨어지면서 분쟁지역의 영유권이 애매모호해졌다. 일본은 전후 반성, 아시아와 공존보다 철저히 영토 회복과 국익 추구를 우선시한 것이었다.

이에 비하여 독일은 어땠을까. 1945∼49년 독일은 완전히 공중분해 된 상태였다. 패전국인 독일은 프랑스와 소련에 영토를 완전히 포기했다. 49∼63년 서독 총리로 재임한 콘라드 아데나워는 영토문제에 철저히 양보함으로써 유럽연합국의 일원으로 재탄생하고자했다. 대표적인 것이 알자스로렌과 구 프로이센 지역이다. 프로이센은 근대독일의 모체이다. 독일인들이 얼마나 애정을 가지고 있는가는 두말할 나위도 없다. 남한보다 한참 넓은 11만2000㎢에 달한 프로이센은 완전히 폴란드 땅으로 변했다. 거기 살던 독일인은 모두 추방당했다. 비유하자면 마치 서일본지역에 살던 일본인이 전부 쫓겨나고 그 자리에 한국인이 살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독일과 프랑스 국경인 알자스로렌은 어떤가. 대부분 독일계 주민이 살고 있었다. 독일어 주민이 90%, 프랑스어 주민은 7∼8%에 불과하다. 그러나 독일은 석탄과 철강이 생산되는 엄청난 노른자 땅을 프랑스에 고스란히 넘겼다. 지역주민들 국적은 모두 강제로 프랑스로 바뀌었다. 바로 그 자리에 독·불 양국이 협력하여 유럽연합의 모태인 석탄철강공동체를 만들었다. 분쟁의 씨앗이었던 알자스로렌 지역은 유럽통합의 중심지로 탈바꿈하였다.

독일은 피와 땀이 밴 목숨 같은 영토를 완전 포기하였다. 독일의 양보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유럽연합, 유럽의 평화와 통합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20세기 들어 불과 20년 만에 두 번이나 세계대전을 치른 독일과 프랑스 간 증오심을 말할라치면, 중국과 일본 사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다. 독일은 스스로 영토를 포기하면서 증오를 넘어선 것이다.

독일과 일본, 아데나워와 요시다는 극명하게 대조된다. 일본정당의 대표선거가 한창이다. 일본총선거도 코앞에 다가왔다. 여야 할 것 없이 일본 정치가들의 우익포퓰리즘, 영토내셔널리즘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동아시아통합을 모색하는 위대한 정치가의 출현은 일본에 기대할 수 없는 것일까. 그저 어처구니없는 넋두리일까.

양기호 성공회대 교수일본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