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정승훈] 광풍 속에서 기억할 것들

입력 2012-09-16 20:17

신학대학을 졸업한 그는 ‘교회 헌금 대신 너희가 스스로 벌어서 교인을 섬기며 복음을 전하라’는 가르침을 마음에 새겼다. 사진 콘테스트에서 받은 상금으로 사진관을 차렸다. 3년간 돈을 번 뒤 농촌교회를 개척하겠다는 결심이었다. 3년여 후 서울 변두리의 농촌교회로 가게 됐지만 그의 삶은 뜻과는 달리 흘러갔다. 여름방학을 앞두고 교회 주변에 ‘모여라 동무야, 여름성경학교로’라는 전단지를 붙였다가 경찰에 끌려가 모진 폭행을 당했다. ‘동무’라는 표현 때문에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게 이유였다.

어린 아들을 병으로 잃는 불행까지 겪은 후 그는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고향인 춘천으로 귀향해 작은 만화가게를 차렸다. 그러던 어느 날 가게 인근에서 지역 파출소장의 초등생 딸이 성폭행당한 뒤 살해됐다. 당시 내무부장관은 시한을 지정해 경찰을 몰아붙였고, 검거 시한 하루 전 그가 범인으로 체포됐다.

그는 재판에서 “고문에 못 이겨 거짓 자백했다”고 항변했지만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를 범인이라고 지목했던 증인들도 강요와 협박에 의한 증언이었다고 뒤늦게 고백했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1987년 15년간의 복역 끝에 모범수로 석방된 그는 91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목회를 하면서 그는 누명을 벗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번번이 벽에 부닥쳤다. 99년 서울고법에 재심을 청구했으나 이듬해 기각됐고, 대법원도 그의 요구를 기각했다. 마지막 희망으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서류를 제출하자 2007년 11월 재심 권고 결정을 내렸다. 그로부터 4년 남짓 후인 지난해 10월 27일 대법원은 재심사건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정원섭(78) 목사가 초등학생 성폭행 살인범으로 체포된 지 39년 만이었다.

요즘처럼 뉴스를 보는 일이 불편했던 시기는 없었던 것 같다. 성폭행, 추행, 아동 포르노, 화학적 거세 등등의 단어가 뉴스 속에서 몇 분간 이어질 때가 많다. 어린 딸이 “아빠, 저건 무슨 말이에요?”라고 물어볼까 두려워 채널을 돌리기도 한다.

검·경이 가해자에 대해 엄정하게 법을 집행하고, 정부가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을 마련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그 과정에서 ‘제2의 정 목사’가 나오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언론 역시 여론을 환기한다며 막무가내로 성범죄 관련 보도를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자문해봐야 한다. 굳이 지난 일을 장황하게 곱씹은 이유다.

정승훈 차장 s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