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해영 (11) 칼라하리 사막의 눈물 기도에 “여기서 같이 살자”
입력 2012-09-16 18:16
‘여기서 나와 같이 살자. 네가 그것 이외에 무엇을 더 바라니.’
기도 가운데 들려온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기 위해 나는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더 묵상했다.아프리카의 사막까지 간 내가 무엇을 더 바랄 수 있을까. 그간 나는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고 찬송하지 않았던가. 내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으로 충분하지 않느냐는 의미였다.
‘이곳에서 네가 아이들을 잘 가르치고 교회를 세워 복음을 잘 전한다고 해도 그 일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내 앞에서 마음을 지킬 일이다.’
그랬다. 하나님께서는 ‘얘야, 교회를 크게 짓고 학교를 운영해 보자. 사람들을 잘 가르쳐 보자’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저 같이 살자고 하셨다.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으면서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 그 일은 ‘내 일’이다. 내 일을 하려고 하니 힘들고 지쳐 끝내는 그만두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과 참 기쁨과 감사로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이 그 어떤 일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게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칼라하리사막 한 구석에서 혼자 눈물로 기도할 때 주님은 날 만나 불러주셨다.
‘여기서 나와 같이 살자.’
그러고 보니 내 선교사적 소명은 아주 명쾌했다.
‘그래! 무슨 위대한 일이나 힘든 일을 하자는 것도 아니고 그저 같이 살자 하시는데.’
이런 생각에 미치자 안타까움으로 흐르던 눈물이 멈췄다. 주님께서 함께 살자고 한다. 이것이 얼마나 강력하고 아름다운 요청인가. 혼자 남았다는 생각을 밤하늘 멀리 걷어차 버렸다. 주님 계신 여기서부터 시작하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이후 두 달간 한국에 돌아갈 생각을 접고 오직 어떻게 학교를 정상화할지 고민하고 기도했다. 새 학기를 얼마 앞둔 어느 날, 사업팀에서 학교에 관해 의논할 일이 있다는 연락이 왔다. 나 역시 바라던 일이었다. 나는 학교운영계획서를 만들었다. 운영위원회를 만들고 이사장을 선출해 사역을 나눴다. 이사회는 내게 학교를 맡긴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렇게 남의 나라 사람들의 인생을 책임지는 사람이 됐다.
“여기에 있던 분들 모두 다른 일을 하러 떠났지만 제가 여기 남았습니다. 여러분들이 절 선생으로 여겨주셔서 용기를 갖고 이 학교를 책임지게 됐습니다. 보시다시피 저는 힘이 별로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저와 함께 있어 주시기 바랍니다.”
무기한 휴교에 들어갔던 기술학교가 1994년 9월 재개했다. 나는 재학생과 교직원들을 불러 하나님께서 내게 해오신 부탁처럼 같이 있자고 했다. 학교를 맡으면서 세 가지의 원칙을 정했다. ‘현지인 스스로 하도록 지도하기’ ‘일보다 사람에 우선하기’ ‘매사에 감사하기’가 바로 그것이다. 이렇게 원칙을 정하니 그 어떤 일들도 넉넉히 감당해 갈 수 있었다.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여기 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주님과 함께 살다는 사실에 나는 감동하고 감격했다. 내가 바라보는 벌판은 변함이 없었지만 나 자신이 달라져 있었다. 굿호프 학교는 더 이상 사막이 아닌 삶의 터전이자 인생을 만들어 가는 발판이 됐다. 학교는 점차 절망을 걷어내고 정상운영에 들어갔다. 사람이 알아주면 하늘도 알아준다고 한다. 학생들과 교사들과 마을 사람들은 내 마음을 알아줬고 하나님 또한 알아주셨다.
그러던 가운데 10년 세월은 살같이 흘렀다. 굿호프 학교는 재학생, 교사 및 직원들이 80명이나 되는 큰 학교로 성장했다. 졸업생이 400명을 넘어섰고 단기교육을 받은 아주머니 학생도 240명이나 됐다. 어느덧 나는 마을의 지도자급 인사가 돼 보츠와나 어디를 가든 알아보는 사람들이 생겼다. 이제 학교는 저절로 잘 굴러가고 있었다. 또 생면부지의 나라에 와서 사랑과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됐다. 학교를 운영하며 바친 시간과 노력에 비하면 너무나 큰 보람을 얻은 셈이다. 그런데, 중요한 문제가 생겼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