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들의 애환] 골무와 보자기가 판사의 상징?

입력 2012-09-14 21:35


사생활없는 대법관

판사들은 복사 가게 직원처럼 늘 골무를 끼고 산다. “골무가 없으면 판사는 불안해진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온다.

서울중앙지법 김문성 민사 공보판사는 ‘판사의 필수품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그의 손가락엔 파란색 골무가 끼워져 있었다. 김 판사는 “이건 저희 판사들 뇌의 일부분”이라며 “이게 없으면 소위 말하는 ‘멘붕’ 상태에 빠진다”고 했다. 파란색 골무 표면에는 오돌토돌 돌기가 돋아 있다. 바느질에 쓰는 골무와 다른 부분이다. 돌기 덕분에 서류는 빠르고 편하게 넘어간다.

판사들은 하루 수천 장의 서류를 검토해야 한다. 재판이 시작되면 재판 당사자들은 엄청난 양의 증거들을 쏟아낸다. 대부분 서류다. 서울중앙지법의 단독판사는 “재판은 퍼즐”이라고 했다. 그는 “1000피스짜리 퍼즐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원고와 피고는 자기에게 유리한 수만 개의 퍼즐 조각들을 들고 온다. 그 조각들을 일일이 다 확인해야 재판에 중요한 조각들만 추려낼 수 있다”고 말했다. 골무가 없었다면, 판사들의 지문은 닳아 없어지고, 침샘은 말라버렸을 것이라는 우스개도 있다.

법원은 판사들에게 정기적으로 골무를 지급하고 있다. 법정에는 판사들을 위한 공용 골무가 비치돼 있다. 사이즈는 대·중·소 3가지이고, 양면으로 사용 가능하다. 한쪽 돌기가 다 닳으면 안쪽 면을 바깥으로 뒤집어 사용하곤 한다.

보자기도 판사를 상징하는 물건이다. 판사들은 재판 관련 서류에 파묻혀 산다. 복잡한 사건의 경우 어른 키 높이의 캐비닛이 서류로 가득차곤 한다. 일과 시간에 쫓겨 미처 보지 못한 서류는 집에 가져가야 한다. 서류용 보자기가 필요한 대목이다. 수천장짜리 서류 뭉치들을 담을 수 있는 가방은 흔치 않기 때문에, 오히려 보자기가 편하다는 게 판사들의 설명이다. 보자기로 인해 웃지못할 오해도 생긴다. 전직 고등법원 부장판사는 “매일같이 서류를 보자기에 싸서 집에 들어갔는데, 아파트 경비원이 그걸 보고는 ‘판사 참 좋은 직업이다’라고 생각했답니다. 그 안에 든 게 서류가 아니라 돈이나 선물인 줄 알았던 거죠”라고 말했다. ‘서류 보는 판사’가 ‘뇌물 받는 판사’가 될 뻔한 사연이다.

정현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