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들의 애환] 고되고… 외롭고… 사명으로 버티는 사법부의 꽃

입력 2012-09-14 21:28


사생활없는 대법관

대법관은 사법부의 ‘꽃’으로 불린다. 국가 최고 사법기관의 정점에 있는 판사라는 권위와 명예 때문이다. 그러나 법원 일각에서는 대법관을 ‘십자가를 짊어진 자리’로 부른다. 고되고 외로운 자리라는 의미다. 1년 365일을 대법원에 갇혀 사는 그들은 산더미 같은 사건 외에 고독과도 싸워야 한다. 대법관을 보좌하는 한 판사는 “대법관의 일은 고되고, 생활은 외롭다”며 “꽃이라는 말이 대법관의 권위에 초점을 뒀다면 십자가라는 표현은 그들의 실제 생활을 반영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대법관의 공식 업무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다. 하지만 실제로 이렇게 일하는 대법관은 없다. 지난해 말 퇴임한 A대법관은 평일 일과 후 구내에서 간단히 식사를 한 뒤 오후 7시부터 11시까지 야근을 했다. 주말에는 김밥이나 도시락을 싸왔다. 휴일도 출근 시간만 평일보다 1시간 늦췄을 뿐 퇴근 시간은 밤 11시였다. 대부분의 대법관은 평일 12시간, 주말 10∼11시간씩 매주 80시간 이상 일한다.

A대법관은 “월화수목금토일요일에 일했다”며 “처음 1∼2년은 집에 와서 새벽 2시까지 했는데, 너무 힘들어 이후에는 밤 11시까지만 사무실에서 야근했다”고 말했다. 그는 “퇴임하고 나니 법(法)자 근처에도 가기 싫었다”며 “물리적으로 심리적으로 갈등이 너무 많았다”고 털어놨다. 전임 B대법관도 “대법관은 별도 휴식이 없더라. 조금 일을 느슨하게 하는 게 휴식이더라”고 했다.

대법관이 격무에 시달리는 건 폭증하는 사건 탓이다. 지난해 대법원에 접수된 사건은 3만7000여건에 달했다. 매일 100건이 넘는다. 대법원장을 제외한 대법관 12인이 연간 3100건을 처리한다. 미국 연방대법원 법관이 1인당 연간 80여건을 처리하는 것과 비교하면 살인적인 수치다.

◇주 80시간 격무, 외로운 20분 식사= 대법관이 중노동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3개조로 구성된 재판연구관들의 보좌 덕분이다. ‘신건조’(新件組·대법원으로 올라온 사건을 처음 검토하는 조)로 불리는 연구관들은 사건이 접수되면 각하, 기각, 심리 등으로 사건을 크게 분류한다. ‘전속조’는 대법관 1인에게 각 3명씩 배속되는데, 배당된 사건의 법리를 연구하는 역할을 한다. ‘공동조’ 70여명은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한 사건에 대해 50∼100쪽 보고서를 대법관에게 제출한다.

대법관은 단계별로 모든 보고서를 검토해야 하고, 사건 내용도 훑어봐야 한다. 모든 최종적 책임과 판단이 대법관에게 있는 구조다. 업무량도 가장 많다. 대법관들은 대개 대법원 3층 전용식당에서 함께 점심을 먹는 경우가 많다. 낮 12시25분쯤이다. 저녁은 구내식당을 이용하거나 배달음식을 먹는다. 재판연구관들과 먹는 경우도 있지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대부분 혼자 먹는다. 현직 C대법관은 평일 매일 오후 5시20분쯤 구내식당에서 20분 동안 혼자 식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말도 마찬가지다. 전속연구관이나 다른 직원이 불편해하지 않도록 집무실에서 혼자 밥을 먹는다. D대법관은 주말에 출근한 뒤 집무실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연구관들 사이에서는 “D대법관이 식사도 거른 채 일만 한다”는 걱정이 떠돌아 다녔다는 후문이다.

◇산더미 기록에 눈 혹사, 후유증도 심각= B대법관은 임기 중 녹내장 수술을 받았다. 끊임없이 서류를 읽어야 하는 직업 특성상 눈이 너무 시리고 아팠다. 처음에는 인공눈물로 버텼지만 결국 수술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대법관 대부분이 눈 질환 등에 시달리며 퇴임 이후 후유증으로 병원을 찾는 경우가 많다. 신임 대법관들이 전임 대법관을 찾아가면 반드시 듣는 덕담이 “좋은 판결을 많이 하라”가 아니라 “건강을 잘 챙기라”는 말이라고 한다. ‘대법관은 임명된 당일만 좋다’는 말도 오래된 얘기 중 하나다.

13인의 전원합의체나 4인 소부 판결에서 받는 심리적 압박도 매우 크다고 한다. 일명 ‘독수리 5형제’였던 진보 성향의 한 전임 대법관은 “6년 동안 주요 판결에서 내 의견이 채택된 경우가 거의 없었다. 답답했다”며 “나는 대법관인데도 이렇게 억울하고 서러운데 가진 거 없고 못 배운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얼마나 이런 상황을 많이 겪을까 자주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이런 고충에도 불구하고 대법관은 여전히 판사 2500여명이 선망하는 사법부의 꽃이다. 장관급 예우를 받고 가장 권위 있는 판례를 확립해 간다는 자부심도 크다. 7월 퇴임한 전수안 대법관은 “힘들었지만 행복하고 보람된 시간이었다”고 했다.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