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희망지기-이영수] 활활 타오르는 보일러 불꽃처럼 하나님의 따스함 널리 전해졌으면

입력 2012-09-14 20:30


‘사랑의 보일러 교실 ’ 열고 은퇴·구직자에 기술 전수 이영수 명장

경기도 분당에 사는 김성인(59)씨는 지난 8월 말부터 매일 퇴근 후 서울 구의동 주택가에 있는 ‘사랑의 보일러 교실’을 찾는다. 대기업 부장인 그가 이곳을 찾는 이유는 은퇴 이후의 삶을 준비하기 위해서다. 회사의 사회공헌 활동으로 참여하면서 이곳과 연을 맺었다는 김씨는 기술도, 보일러도 배운 적이 없지만 이곳을 다니는 것이 무척 즐겁다. 1998년 외환위기 때 사랑의 보일러 교실을 설립해 14년간 500여명의 기술자를 배출한 이영수(57) 명장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이다.

“이 기술 배워서 노후의 생활방편 마련에 그치지 말고 사회에 좋은 일을 하고 싶어요. 이 명장님처럼.”

이런 생각을 가진 이는 김씨 혼자만이 아니다. 수강하는 이들 모두 ‘이 명장과 같은 보일러 기술자’가 되기 위해 이곳에 온다. 매일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주 4회의 수업에는 정장을 입은 50대 아저씨, 곱게 화장한 60대 아주머니, 작업복을 입은 20대 남성 등이 지하의 비좁은 교실 겸 실습실로 모인다.

베이비부머 은퇴자부터 일자리를 구하는 청년까지 학생들의 나이와 직업, 사연은 다양하다. 하지만 이곳을 찾은 이유는 하나다. 새로운 인생 2막을 열기 위해서다. 이 명장이 기술뿐 아니라 삶의 희망까지 전수한다는 소문에 11명을 뽑는 6개월 과정 한 기수에 전국에서 기수마다 100여명씩 몰린다. 형편이 어려운 사람에게 우선권이 있어 재수, 삼수를 해서 들어오는 경우도 있다.

“아, 우리 명장님 굉장히 훌륭하지. 요즘 실직자들이 얼마나 많아요. 이들에게 자기 기술로 인생 재기의 기회를 무료로 해준다는 건 정말 대단한 겁니다. 이것만큼 확실한 봉사가 어디 있어요?”

경기도 인천에서 온 전직 초등학교 교장 석준원(62)씨가 조심스럽게 용접 기계를 만지며 말했다. 용접수업이 있던 이날 수강생들은 이 명장과 구슬땀을 흘리며 보일러 부속을 용접했고 내부 구조를 익혔다.

이 명장이 사는 법

35년 전부터 보일러 외길 인생을 걸어온 이 명장에게 봉사는 특별한 일이 아니다. 그는 17세 때부터 청계천 기술자에게 배운 보일러 기술로 22세 때인 1977년 서울 송정동에 ‘만물공작소’를 차리고 봉사를 시작했다. 전국의 불우 이웃과 독거노인의 보일러를 무료로 수리해주며 용접, 목공, 미장 등의 기술도 하나씩 섭렵해 10개의 관련 자격증을 취득했다.

“아는 사람도 거의 없을 때라 일감이 들어오질 않는데 보일러는 만져보고 싶어 시작한 게 ‘보일러 무료 수리’예요. 잡다한 것도 무료로 해주니 남들이 봉사라고 해주는 거죠. 그때는 현장 가서 고치는 게 진정한 인턴과정이라 보고 한 일인데.”

1998년 노동부(현 고용노동부)로부터 ‘보일러 취급 명장’으로 선정된 것도 이 같은 봉사활동이 밑거름이 됐다. 명장이 되는 기준 가운데 사회 공헌도 있기 때문이다. 설치가 까다로운 동파이프 보일러 시공 등의 전문기술을 익히고 일감이 안정적으로 확보된 이후에도 그는 봉사를 계속했다.

“당시 명장 기준이 40세 이상, 현장 경력 20년에 재료 절감, 열효율 높이는 방법 등 보일러 분야 발전에 현격한 공로가 있어야 했어요. 서울시장 추천도 받아야 했고요. 봉사활동이 사회공헌도로 인정돼 명장 선정에 영향이 있었던 것 같아요.”

명장 표창과 그해 서울시로부터 받은 ‘자랑스러운 시민상’ 상금으로 그는 총 1100만원을 받았다. 월 소득의 2배가 넘는 상금을 받자 이 명장은 오히려 부담감을 느꼈다. ‘국민들의 세금으로 받은 포상금이니 의미 있게 써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외환위기였던 그 당시 언론은 매일 실직자와 노숙자의 모습을 비췄다. 이 명장은 사회복지기관에 기부하려던 생각을 바꿔 동사무소 사회복지사와 함께 서울역과 용산 등지를 돌며 이들의 필요를 직접 묻기로 결심했다.

“실직자와 노숙자 가운데 배워보겠다는 사람들이 있어 모아서 기술을 가르쳐 보기로 했죠. 이듬해 2월 성동구가 뚝섬에 장소를 마련해 줘 시작한 게 사랑의 보일러 교실의 첫 출발입니다.”

상금을 마중물 삼아 재능기부를 시작했지만 운영하는 데 훨씬 더 많은 돈이 들었다. 뚝섬에 서울숲이 생기면서부터는 교육 장소도 옮겨야 했다. 임대료 부담 때문에 지상에 있던 교실이 지하로 내려오는 등 이사도 2번이나 했다. 그러다보니 장소가 좁아 수용 학생이 절반으로 줄었다. 이마저도 이 명장의 월수입 절반이 투입되고 살고 있는 집의 규모도 줄여야 그럭저럭 꾸려 나갈 수 있었다.

“지난달 28일 27기가 졸업했는데 봉사활동을 10시간도 못했어요. ‘일일수강료 900원’에 ‘봉사활동 50시간’은 나와 학생들의 약속인데, 이렇게 못한 건 처음입니다. 올해 2월에 이삿짐 풀고 해서 경황이 없긴 했지만 무엇보다 큰 건 금전적인 이유예요. 수업도 일주일에 6일 하던 것을 4일로 줄였을 정도니까.”

그럼에도 그가 이 교실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기술을 배우러 사람들이 계속 찾아오기 때문이다.

“이게 돈뿐 아니라 결국 내 일자리까지 나눠야 하는 건데, 뭐 좋아서 하겠어요. ‘장소와 비용 마련 안 되면 포기해야겠다. 장비 다 처분해야겠다’ 싶어도 막상 못하겠는 거야. 한번 문 닫으면 장비를 다시 갖춰야 해서 못 열거든요. 이 기술로 사람이 먹고살고 희망을 찾는 데 어떻게 그러겠어요.”

나누고 남은 건 사람, 희망

이 명장의 열정은 절망에 빠진 한 생명을 살리기도 했다. 2005년 2월, 그에게 기술을 배우고 싶다며 30대 중반의 한 남자가 찾아왔다. 사업이 부도나 자살하려고 한강까지 갔다는 그 남자는 뛰어들기 전 TV에서 본 사랑의 보일러 교실이 생각났다고 했다. ‘일단 와 보자’는 생각에 다짜고짜 이 명장을 찾아왔다는 남자는 다리도 절고 있었다. 이 명장이 보기에 그는 말 한마디 잘못 들었다간 다시 죽으러 갈 것 같았다.

“‘이번 기수가 끝나면 들여보내주겠다’고 하니 가을에 정말 다시 왔더라고요. 그분이 13기로 졸업했는데 12기 선배들과 함께 창업을 해서 이젠 돈을 저보다 더 잘 벌어요. 가정도 잘 꾸리고 살고요. 졸업식 때 다과회 하라고 봉투도 건네는데 후배들 챙기려고 하는 걸 보면 기특하죠.”

60대 은퇴자도 이곳을 거치면 신규취업과 창업이 불가능이 아닌 현실이 된다. 평생 택시기사로 살아온 2기 한 졸업생은 61세에 서울 금호동에 창업해 매달 평균 300만원의 소득을 올린다. 올해 72세지만 은퇴는 없다. 그의 아내도 16기로 이 명장에게 보일러 기술을 배웠다. 단골 고객과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서 아예 부부가 나선 것이다.

지하철 공기업에 비정규직으로 취업한 졸업생도 있다. 6기 졸업생 중 한 명은 61세의 나이로 취업해 수도·배관 작업을 맡아 70세까지 일했다.

이 명장에게 기술을 배우고 희망을 찾은 졸업생들은 스스로 후배를 위한 다양한 지원을 하는 게 특징이다. 졸업생들은 후배를 위해 식사를 대접하며 창업 노하우를 전한다. 14년간 사재를 털어 야간 수업을 진행한 이 명장의 헌신을 기억하며 챙기는 것도 이들이다. 최근 72세인 한 졸업생은 이 명장을 위해 보약 한재를 해 왔다. 자기 몸 돌볼 틈도 없이 밤낮 일하는 그를 걱정해서다.

“우리 학생들이 6개월간 열심히 공부해 평균 1.7개의 자격증 따고 취업해서 월급 받을 때 보람차죠. 봉사 나가 고친 보일러가 잘 돌아갈 때 이들이 짓는 흐뭇한 표정을 보는 것도 참 좋고요. ‘여러분도 취업할 수 있고 창업할 수 있다’는 말 전하러 후배들 찾아올 때도 그렇고.”

한 명이라도 더

그래도 아쉬운 건 교육장소다. 이 명장의 모든 이야기는 장소에서 시작해 장소로 끝냈다. 그는 시청에 가 여러 차례 민원을 넣어봤지만 모두 허사였다며 여기가 마지노선 같다고 했다.

“이곳으로 이사 오기 전, 독실한 크리스천인 안식구도 ‘이제 이쯤에서 그만하자. 밤낮 타인을 위해 할 수 있겠느냐’고 합디다. 그런데 1층보다 저렴한 지금의 교실이 나온 거죠. 그랬더니 안식구가 ‘지하가 나온 것도 하나님의 뜻이 있어 그런 거니 힘들어도 해 보세요’라더군요.”

이 명장은 2004년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에게 시청에서 직접 만나 얘기하자는 약속을 받아냈다. 뚝섬 서울숲 행사에 참석한 이 시장에게서 추후 시청에서 만나자는 증거로 명함에 사인 한 장을 받았다. 그러나 갈 때마다 비서실과 담당 부서를 전전하기만 했을 뿐, 시장을 만날 순 없었다.

“명장으로 내 일감 줄여가며 기술자 500명을 배출했는데 장소조차 지원 안 하니 너무 서운합니다. 성과요. 노년층 취업률 1위도 장담하고요. 큰돈 못 벌어도 창업비용 적고 대체로 안 망합니다. 온돌이 존재하는 한 이 일은 없어지지 않거든요. 정년도 없어요. 이게 노년층 일자리 늘리는 일 아니면 뭐겠습니까?”

이 보일러로 하나님의 따뜻함이 전해지길

그는 신앙인이다. 매주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없다는 점에선 평균적인 교인이라 보긴 어렵지만 하나님의 자녀라는 면에선 신앙인이라 단언했다.

이 명장이 교회를 다닌 건 일곱 살 때부터다. 음악을 좋아했던 그는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흘러나오는 찬송소리를 참 좋아했다. 커서도 찬송이 들리면 발걸음을 멈추곤 했다는 그는 지금은 교회 출석을 잠시 중단하고 있다. 다니던 교회가 이런저런 이유로 쪼개지고 교인들 간에 좋지 않은 모습을 많이 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신앙을 버린 것은 아니다. 기독교방송 등을 통해 성경을 묵상하고 말씀을 듣는다.

기도도 열심히 한다. 이 명장은 자신을 위한 기도보다는 가족이나 졸업생을 위한 기도를 많이 한다고 했다. 교회에서 멀어진 졸업생을 보면 다시 돌아가라고 설득도 한다. 무교인 졸업생이 ‘명장님 교회 다니는지 몰랐다’고 하면 ‘교회에 좋은 말씀 있으니 가 보지’라며 넌지시 간접적으로 전도한 적도 있다. 여전히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가족들은 그가 하루빨리 교회에 출석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봉사 다닐 때마다 매번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자연스럽게 전도한다는 이 명장은 무슨 기도를 할까.

“이 보일러가 활활 잘 타서 하나님의 따뜻함이 이웃에게 퍼지게 해 주십시오. 우리 학생들 사고 나서 다치지 않고 무사히 봉사 잘 끝내게 해주시고요.”

소외된 이웃을 위해 자신의 재능을 나누는 삶을 사는 이 명장은 기도조차 그를 닮아 있었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