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현의 사막의 구도자들] 웃음으로 불의(不義)의 마귀를 물리치는 방법에 대해서
입력 2012-09-14 20:27
지하철을 주로 이용하는 나는 어느 날 자리에 앉게 되었다. 밀폐된 공간의 이산화탄소 때문인지 이내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지하철에서 반수면 상태로 꾸벅꾸벅 조는 것은 괴롭다. 졸다가 고개를 앞으로 떨구는 것은 독백 같은 잠이니 그나마 낫지만 행여 옆으로 기울어지는 날이면 그 무슨 민폐인가. 나는 내려오는 눈꺼풀을 애써 올리며 옆 사람이 펼쳐들고 탐독하는 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나는 본래 지하철에서 옆 사람의 책을 함께 읽는 습관이 있다. 보통 곁눈질 독서는 지하철의 흔들림 때문에 몇 줄에서 그치는 게 다반사다.
자아성찰의 통로, 웃음
그날따라 상황이 달랐다. 몇 줄을 따라 내려가는데 내리깔리던 눈꺼풀이 번쩍하고 올라가며 잠이 확 깨는 것이 아닌가. ‘웃음’, 바로 웃음에 대한 책이었다. 혹시나 읽던 그 페이지를 옆 사람이 금방 넘길까 봐 나는 정신을 집중해서 두 페이지를 재빨리 읽어 내려갔다. 만약 이 사람이 다음 정거장에서 내린다면? 이런 생각에 나는 제목이라도 알아두어야겠다는 마음으로 말문을 꺼냈다. “혹시 이 책 제목이 뭔가요?” 이미 내 곁눈질 독서를 의식하고 있던 책 주인은 씩 웃으면서 아무 말 없이 책 표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웃음의 미학’. 책의 제목이 ‘웃음의 미학’이었다.
내가 웃음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제법 오래됐다. 1980년대 후반 학창시절에 은사이신 최윤 선생의 강의를 통해 프랑스 철학자 베르그송의 웃음에 관한 책을 잠시 접한 적이 있다. 이후 박사논문을 준비하면서 웃음에 대한 고대 기독교인의 견해를 더 자세히 알게 됐다. 웃음뿐만 아니라 눈물, 꿈, 분노 등 인간의 일상적인 행동에 대한 철학과 신학의 반성은 역사가 오래된 것이다. 특히나 사막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이런 주제는 자아성찰의 통로였다. 그런 이유로 ‘웃음의 미학’은 정다운 친구처럼 내게 다가왔다.
무절제의 상징, 폭소
초기 기독교인은 웃음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다. 삼위일체 신학의 대가이자 수도자였던 바실리우스는 웃음을 절제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가 말하는 웃음이란 미소가 아니라 폭소이다. 왜 웃지 말아야 하나. 폭소는 무절제의 상징이다. 폭소는 마음의 평정을 잃는 것이다. 즐거운 마음으로 얼굴이 밝아진다는 말씀(잠 15:13)은 미소로써 영혼의 기쁨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반면 대소(大笑)는 어리석은 영혼에서 흘러나오는 헛된 짓이다(전 7:6). 예수는 기뻐하고 슬퍼하고 피로해 하는 등 인간적인 모든 감정을 겪으셨지만 결코 폭소하지는 않았다. 바실리우스는 누가복음 6장 25절을 인용한다. “화 있을 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사막의 구도자들도 비슷한 입장이었다. 웃음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쫓아 버린다. 이런 기독교적 전통은 ‘무지해서 웃는다’는 서양철학의 한 흐름에 그 맥이 닿아 있다.
그런데 사막 기독교인들의 견해는 칼뱅의 제네바 종교개혁에서 법률로 바뀌어 버렸다. 제네바 시(市) 방위사령관 페린은 결혼식에서 예의에 어긋나게 큰소리로 웃었다. 큰소리로 웃으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 대가는 혹독했다. 페린은 시의회 경찰력에 의해 8일간 구금되었고 크게 웃은 죄를 교회의 회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고백해야 했다. 이런 내용은 1546년 8월 11일 칼뱅이 쓴 편지에 나온다. 수도자들과 칼뱅의 엄숙주의는 생각만 해도 숨이 탁 막힐 지경이다.
유머와 웃음의 효능
반면 루터는 웃음과 농담을 즐겼다. 루터의 이런 태도는 또 다른 종류의 사막 기독교 전통에 연결돼 있다. 마귀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데, 그중에는 슬픔과 우울을 가져다주는 마귀도 있다. 루터는 유머와 웃음이 우울의 마귀를 물리치는 데에 효험이 좋다는 입장을 받아들였다. 아울러 마귀의 간계에 의해 암흑과 같은 시대가 열린다 해도 하나님의 사랑이 영혼을 궁극적으로 이끄시는 이상, 장차 다가올 최종적인 승리를 미리 기대하면서 여기 이 땅에서 웃을 수 있다고 보았다. 루터의 시대에 마귀의 세력은 교종권(교황권)을 통해 온갖 악한 짓을 저질렀다. 루터는 “꿀꿀거리는 돼지새끼”라고 교종(교황)을 마음껏 조롱하면서 마귀를 농락했던 것이다.
마귀를 조롱하며 농락하는 것으로서의 웃음. 루터에게 있어서 웃음이란 한편으로 불의한 마귀는 물론 그런 마귀의 하수인에 대항해서 싸우는 영적 싸움의 도구였던 것이다. 루터의 책은 그 어떤 신학자의 책보다 교종(교황)을 향한 투박하고 거친 욕설과 냉소가 많이 등장한다. 그런 루터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마귀는 오늘날도 불의를 부추긴다. 재판한 지 18시간 만에 사람을 죽인 것에 대해 제대로 된 뉘우침 한마디 없는 것은 양심과 상식과 정의를 저버리고 불의(不義)의 편으로 기울어 있는 것이다. 마르틴 루터라면 그런 불의한 살인에 대해 조소를 퍼부었으리라.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전 13:6). 불의의 마귀를 조롱하며 마음껏 웃는 것은 마귀를 이기는 또 다른 길이다. 마음껏 웃으면서 불의의 마귀를 이길 수 있다니! 나는 그런 방법을 가르쳐 준 마르틴 루터에게 감사드린다.
<한영신학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