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배의 말씀으로 푸는 건강] 자살
입력 2012-09-14 17:53
만성적인 질병을 갖고 있어 견딜 수 없는 육체의 고통을 죽음으로 끝내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분들의 절규를 듣는 듯합니다. “나는 죽음을 원치 않아. 그러나 이것 외에 견딜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해.” 삶에서 대신할 수 없는 소중한 것을 잃은 분들도 있겠습니다. 다시 벌충할 수 없을 것 같은 재산일 수도 있고 평생을 같이 해온 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있으며 삶을 지탱해 왔던 인생의 목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상실의 아픈 경험에 더해 더러는 계속되는 스트레스와 여러 사건들로 삶의 무게가 지탱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을 수도 있습니다. 일상이 송두리째 뒤흔들릴 때 그 참담한 심정을 타인이야 어찌 짐작이나 할까요? 그저 너무나 압도적이고 견디기 어려운 수준의 감정이 아닐까 가늠해 볼 뿐입니다.
누구라도 한계상황서 빠지기 쉬운 유혹
당신에게 일어나리라고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에 빠졌다고 느낄 수도 있겠군요. 친구들로부터 고립된 것 같고 상황을 바꾸기 위해 내가 가진 선택권은 없어 보이며 아침이 되어 눈을 떠야 하는 게 고통일 수도 있겠습니다. 절망은 인간이 만날 수 있는 병 가운데 가장 일반적인 것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중국 배우 장궈룽(張國榮)이 두어 해 전 그의 14층 아파트에서 투신하며 남겨놓은 메모, “사는 게 의미 있느냐? 말해보라. 네 자신을 속여서라도”를 보고는 삶의 의미를 죽음으로라도 찾고자 한 그의 절박감에 안타까움을 넘어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최근에 20대 학생들의 자살 소식을 접하고선 마지막에 이를 때까지 젊은이들이 겪었을 마음의 고통을 생각하니 가슴이 뻐근해지고 눈시울이 붉어져 잠시 일손을 멈춰야 했습니다. 그 가족들의 상실감과 안타까움,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을 슬픔은 또 어찌하고요? ‘위기상담학’에서 노만 라이트는 “누구라도 고통이 커지면 육체적, 감정적인 무질서에 빠지기 마련”이라고 했습니다. 상황에 매몰되면 고통이 현실을 평가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막아버린다는 뜻이지요.
주님 품에 어린아이처럼 푸욱 안겨보세요
자살은 비단 우리 범인들의 얘기만은 아닌가 봅니다. 기도의 사람 엘리야도 로뎀나무 아래서 죽고 싶을 만큼 깊은 실의에 빠졌습니다. 잘 풀리지 않는 현실 앞에 좌절하고 괴로워하는 선지자 요나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겠다”는 독백도 생각납니다. 재산은 물론 자식조차 모두 잃은 동방의 의인 욥이 고통 속에서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기도 했었죠. “너희가 나와 함께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있을 수 없더냐”는 예수님의 절절한 외로움도 생각납니다. 그래요. 엘리야나 요나나 욥도 무너지는 가슴에 파묻혀 도무지 자신조차 믿고 싶지 않을 때가 있었을 것 같군요. 하나님이 자신들을 소유하고 조작하기 위한 대상으로만 여기시진 않는건가 원망스러웠을 법도 하고요. 절망이라는 바위 밑바닥에서 하릴없이 눈물로 양식을 삼았을 것 같군요.
여러분의 영혼에 고통스런 비수의 흔적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작지만 제게도 있었습니다. 또 예수님의 옆구리에도 있었고요. 그렇다고 섣부른 위로나 대안을 제시하지는 않겠습니다. 지금 그 고통 속에 있는 자는 내가 아니라 당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한 가지는 말씀드리고 싶군요. 변화의 문의 손잡이는 안쪽에 붙어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삶의 무게 아래 의연히 서 있기로 결정한다면, 그리고 내면에 붙은 문고리를 돌리기로 결정한다면, 그 순간 하염없이 문 앞에 서서 기다리셨던 우리 주님(계 3:20)의 얼굴을 마주 대할 것입니다. 그리곤 기쁨과 감사와 사랑의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그분 품에 어린아이마냥 푸욱 안겨볼 것입니다.
<대구 동아신경외과원장·의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