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우 칼럼] 십자가와 피뢰침
입력 2012-09-14 17:52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 위에 달린 피뢰침은 어딘가 모르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십자가 위에 피뢰침을 다는 것은 교회가 겉으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속으로는 은근히 자연 질서를 더 믿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혹시 우리는 피뢰침을 달면서 하나님의 실수(?)를 염려하는 것은 아닌가. 사실 벼락을 맞은 교회도 있고 신자도 많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대학시절 친구와 함께 길을 걷다가 그 친구가 벼락을 맞아 죽는 것을 보고 바로 신학을 하기로 서원하였다. 만약 그때 피뢰침이 있어서 벼락을 피했다면 루터의 종교개혁은 없었을까.
십자가와 피뢰침은 우리에게 자연 질서와 초자연 질서 사이에 있는 긴장 관계를 잘 드러내 준다. 우리는 구원의 하나님이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지켜주심을 믿을 뿐 아니라 번개는 높은 곳을 때린다는 자연 질서를 세우신 창조주를 경외해야 하는 양면성을 유지해야 한다. 이 균형을 잃으면, 때로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을 믿는 ‘초자연주의’에 치우치기도 하고 때로는 자연과학 질서만을 믿는 ‘자연주의’에 빠지게 된다.
자연 질서와 초자연 질서의 갈등은 단지 피뢰침과 십자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는 병이 들 때 의사의 처방에 따라 약을 먹고 쉬면서 회복하는 자연 질서를 따를 것인지, 기도와 안수와 금식으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기적을 기다릴지 고민하는 경우가 있다. 특별히 의사가 치료할 수 없는 불치의 병으로 판정을 받은 경우에는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에만 매달리면서, 소위 ‘성령 수술’을 하는 자를 찾거나 모든 병을 귀신에게 돌리면서 귀신을 내쫓는 능력을 가진 자를 만나기도 한다.
기독교의 역사를 돌아보면, 자연주의자들과 초자연주의자들은 각자 자기 신앙이 옳다고 우기면서 치열하게 싸웠다. 중세의 초자연주의자들은 이 세상을 떠나 수도원으로 들어가 인간적인 모든 욕구를 부인하고 온갖 고행을 통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능력과 인격을 갖게 되는 것을 참된 신앙으로 여기던 때가 있었다. 우리 시대의 초자연주의자들도 신적인 능력을 얻기 위해 금식과 산기도로 초월적 능력을 얻어 단시간에 교회를 부흥시켜 보려고 혼신의 힘을 쏟았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우리의 일상생활이 가장 소중한 신앙의 자리인 것을 잊고 하나님의 인격보다는 능력을 더 강조하며 기적과 초월을 앞세우고 창조 때에 주신 자연 질서가 모든 삶의 기본인 것을 잊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근세의 자연주의자들은 자연과학적 질서만이 참된 진리라고 보고 모든 기적과 초월을 부정하였다. 이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만드신 후에는 진화의 질서에 모든 것을 맡겨 버리고 떠나버린 ‘부재지주’로 생각하였다. 이 함정에 빠진 신자들은 기도하지 않고 오로지 과학적 질서만을 신봉하다 보니 꿈이 없고 성경적인 초월성과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런 자연주의와 초자연주의의 혼란에 대해 십자가 위에 달린 피뢰침은 기독교신앙의 절묘한 조화와 융합을 보여준다. 우리가 피뢰침을 다는 것은 창조주의 자연 질서를 따르는 것이며, 십자가를 다는 것은 자연 질서 너머에 있는 초자연적 은총을 믿는 것이다. 이 두 질서의 균형은 구약시대에 “집을 지을 때는 지붕 위에 난간을 세우라”(신 22:8)는 법을 통해 나타났다. 그 당시에는 평평한 슬래브 형태의 지붕을 만들었기에 그곳에서 놀다가 사고가 많이 났으므로, 모세는 난간의 유무에 따라 책임을 각자 지게 하였다. 그때는 하나님의 능력이 직접 나타나던 시대였지만 하나님의 백성도 실수로 지붕에서 떨어져 죽을 수 있으므로 불상사를 피하기 위해 건축학적인 대책을 세우라고 한다.
지난 8월 28일 우리는 태풍 ‘볼라벤’ 때문에 여러 교회에서 첨탑이 무너져 정전 사고와 인명 피해까지 일으키는 끔직한 사고들을 보았다. 사실 한국교회 대부분의 첨탑들은 구조역학적으로 취약할 뿐 아니라 건물과 비례도 안 맞아 예술성도 떨어져 영혼을 부르는 은은한 종교적 상징물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 위에 단 피뢰침’의 신앙으로 과학과 종교, 영성과 예술성, 인문학과 신학,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의 아름다운 조화와 융합을 이루어 가야겠다.
<총신대 교수, 한국신학정보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