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년, 이순신-⑪ 자살설] 삶의 바다에 투신하라

입력 2012-09-14 18:35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하루 평균 42.6명으로 7년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1위다. 경제 문제와 소외가 가장 큰 원인이다. ‘베르테르 효과’에 의한 모방자살도 이유다.

1598년 음력 11월 18일 이순신은 노량에서 단 한 척의 적선도 돌려보내지 않겠다며 최후의 결전을 선언했다. 다음날 해신(海神)으로 거듭 태어났다. 그러나 몇몇 사람은 그의 죽음을 자살이라고 주장한다. 자살 가능성을 처음 제기한 사람은 숙종 때 대제학 이민서다. 김덕령 장군의 평전인 ‘김충장공유사’를 쓰면서 이순신이 죽기 위해 의도적으로 갑옷을 벗고 전투에 참여했다고 주장했다. 또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 막하에서 활약했던 해남현감 류형, 이순신의 서녀가 작은어머니였던 윤휴도 비슷한 주장을 했다. 전쟁이 끝난 뒤 생겨날 모함과 박해를 피하고, 가족과 부하들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의 삶을 살펴보면 자살할 사람도 아니고, 전사도 고의성이 없다. 전투 때마다 겁에 질린 장졸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가장 앞장서 활을 쏘고 지휘했다. 그를 걱정한 부하들이 말려도 “내 명은 하늘에 달려 있다”며 거침이 없었다. 그랬기에 사천해전에서는 갑옷을 입고도 총탄에 어깨를 크게 다쳤던 것이다. 명량해전에서도 133척의 적선을 보고 두려움에 떨며 머뭇거리는 장수들을 대신해 최전방에서 홀로 일본군과 전투를 하면서 기적을 만들었다.

노량해전은 막다른 골목에 몰린 쥐같은 일본군이 고양이를 물 수밖에 없을 만큼 위험한 해전이었다. 그러나 천명 같이 피할 수 없는 전투였다. 침략자의 야만과 탐욕을 뿌리 뽑으려는 최후의 결전이었기 때문이다. 필사적으로 도망치려는 침략자의 저항도 거셌다. 명나라 장수 등자룡, 이순신 휘하 장수 20여명도 전사할 만큼 격렬했다. 그의 죽음은 ‘태어나면 반드시 죽고,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이라는 소신처럼 책임과 의무에 최선을 다한 결과일 뿐이다. 아무리 안타깝더라도 자살설로 그의 삶을 왜곡하는 것은 베르테르 효과만 낳을 뿐이다.

삶이 힘겨워 세상과의 연을 끊으려 한다면 사랑한 사람보다 사랑해 준 사람을 떠올려 보자. 또 어떤 기회도 없고, 지독하게 외로운 바로 그 순간이 새로운 시작과 만남을 위한 행운이라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 어둡고 차가운 죽음의 바다 대신 ‘필사즉생, 필생즉사’의 각오로 삶과 생명의 바다에 뛰어들어 보자.

박종평 (역사비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