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민태원] 말뿐인 서울시 행정용어 순화
입력 2012-09-13 18:44
서울시가 최근 어려운 공공·행정용어 877개를 발굴해 알기 쉽게 바꿔 쓰기로 했다. 예를 들면 소정양식은 ‘규정서식’, 스크린도어는 ‘안전문’, 가드레일은 ‘보호난간’, 잡상인은 ‘이동상인’으로 바꾸는 식이다. 877개에는 일제 강점기 잔재 용어, 어려운 한자어, 불필요한 외래어 및 외국어, 인격비하 용어 등이 포함됐다. 서울시는 10월 말부터 공문서는 물론 시민들이 접하는 자료, 홈페이지 등 모든 분야에서 순화된 용어를 쓰겠다고 밝혔다. 전자결재시스템에 행정 순화용어 검색·변환 기능을 추가해 공문서 작성 단계에서 철저히 걸러내겠다는 것이다.
관공서는 시민들이 일상에서 쓰는 공공언어를 주로 생산하는 곳이다. 따라서 시민이 이해하기 쉽고, 바르고 품격 있는 언어를 사용하겠다고 천명한 서울시의 의욕은 높이 살 만하다. 하지만 그만큼 실행의지와 실천이 따라 줄지 미심쩍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도 행정용어 순화를 기치로 내세운 적이 있다. 그는 2007년 한글날 무렵 시민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행정 및 표지판 용어를 정비하라고 지시했고, 서울시는 국어 관련 인사 등을 초빙해 ‘행정용어개선위원회’까지 만들었다. 이 위원회는 이듬해 2월 소정양식, 연면적, 시방서, 가드레일, 행락철, 동·하절기 등이 포함된 순화 대상 행정용어 26개를 선정해 발표했다. 위원회는 이후 2008∼2009년 모두 5차례 순화대상 용어 90개를 발굴했다. 서울시는 당시에도 선정된 용어와 바른 표현을 내부 게시판에 올려 직원들이 내려받아 문서작성 프로그램에 등록토록 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때 선정된 순화대상 용어 90개 중 45개는 이번에 발표된 877개에 다시 포함됐다. 45개 용어의 상당수는 3∼4년 흐른 뒤인 지금도 서울시의 각종 공문서에 등장하고 있다.
2008년 1차 순화 용어 선정 시 ‘총면적’으로 바꾸기로 했던 ‘연면적’을 보자. 최근 서울시가 낸 보도자료 ‘전세시장 안정화 대책’(9월 2일), ‘신축공사장 소방안전대책 강화’(8월 22일) 등에는 ‘연면적’이 어김없이 등장했다. 또 서울시 홈페이지에 올라 있는 ‘우이동 산25번지 주변 간선배관 정비공사’(8월 22일) 같은 입찰공고에는 ‘시방서’란 용어가 버젓이 쓰였다. 이는 ‘지침서’로 순화키로 했던 말이다.
서울시는 ‘말로만’ 행정용어 순화를 외친 것인가. 한 공무원은 “관행적으로 쓰는 용어라 바꾸기가 쉽지 않고, 문서작성 프로그램을 일일이 내려받아야 하는 등 환경도 따라주지 않았다”며 군색한 해명을 했다.
2010년 국립국어원 연구에 따르면 우리나라 전체 공공기관에서 어려운 공공용어 때문에 낭비되는 비용이 연간 170억원에 달한다. 행정의 연속성이 지켜지지 않아 서울시가 지난 몇 년 새 낭비한 행정력을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가 될지 가늠하기 어렵다.
박원순 시장은 지난 4일 열린 ‘공공언어 시민돌봄이 한마당’이라는 행사에서 시민대표들로부터 ‘공공언어 개선 으뜸일꾼’ 임명장을 받았다.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공공언어를 아름다운 우리말과 글로 만들고 널리 퍼뜨리는 데 앞장서 달라는 시민들의 뜻이 담겼을 것이다.
하지만 강력한 실행의지와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행정용어 순화는 백년하청(百年河淸)이다. 박 시장의 리더십도 필요하다. 하지만 행정용어 순화에 대한 일선 공무원들의 인식 개선 노력과 지속적인 교육, 철저한 내·외부 모니터링 체계가 따라줘야 한다.
민태원 사회 2부 차장 tw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