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처녀 여왕’ 엘리자베스 1세 그녀도 희생자였다
입력 2012-09-13 18:01
섹슈얼 트라우마/정국/블루닷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 1세(1533∼1603). 그녀의 통치 시절, 영국은 당시 유럽 최강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해 해상 발전의 길을 열고 절대주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젊은 시절, 매우 아름다웠던 엘리자베스에게 44년 재위 기간 유럽의 왕과 왕자의 절반이 구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평생을 ‘처녀 여왕’으로 살았다. 왜일까?
비화가 있다. 아버지 헨리 8세는 캐더린 하워드를 마지막 왕비로 두었다. 헨리 8세가 죽자 하워드는 왕궁 야심가였던 연하의 토마스 시무어 경과 사랑에 빠졌다. 그런데 시무어 경이 어린 엘리자베스를 성추행했던 것이다. 그 불쾌하고 어두운 기억으로 인한 섹슈얼 트라우마가 엘리자베스 1세의 삶에 영향을 끼쳤음은 부인할 여지가 없다.
최근 아동 성폭력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특별법 제정, 가해자 화학적 거세 같은 대책 강화 논의로 우리 사회가 뜨겁게 달아오른다. 하지만 정책 입안자들에 의해 전개되는 이런 논의 속에서, 정작 아동 성폭행 희생자들에 대한 문제는 빠져 있어 우려스럽다. 성폭력 희생자들이 겪는 섹슈얼 트라우마는 암보다 더 흔하면서 무서운 질병이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1세뿐 아니라 러시아 예카테리나 여제, 프랑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러시아 대문호 도스토옙스키, 체코 출신의 부조리 문학 대표주자 프란츠 카프카 등 남녀를 불문한 역사 속 인물들이 같은 고통을 겪었다. 현대에 와서도 영국의 다이애나 비, 미국의 인기 여배우 메릴린 먼로와 앤젤리나 졸리,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 등이 희생자였다. 하물며 보통 사람은 부지기수일 것이다.
전 인류의 무려 3분의 1 이상이 직간접적으로 성적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에서 30년간 정신과 개업의로 지내면서 무수한 섹슈얼 트라우마 환자를 상담·연구해온 저자가 쓴 이 책은 우리 사회의 불편한 진실인 섹슈얼 트라우마에 대한 진지한 보고서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 공황장애에서 자해, 자살충동까지… 인생을 덮치는 트라우마
케리는 등이 너무 간지럽다고 느낀 나머지 식칼로 등을 긁었다. 그때마다 셔츠는 피로 얼룩졌다. 그녀는 자신이 왜 등 긁개 대신에 식칼을 사용하는지를 알 수 없었다. 정신과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비로소 그녀는 의식 밖으로 밀쳐 냈던 한 장면을 떠올릴 수 있었다. 어린 시절, 건초를 말리는 헛간에서 삼촌에게 성폭행을 당했던 것이다. 강간을 당하는 동안, 등에 닿은 건초 때문에 등이 간지러웠던 케리는 성폭행의 고통을 잊기 위해 온 신경을 건초에 집중했다. 강간의 기억은 오래전에 사라졌다. 하지만 까칠까칠한 가려운 느낌은 등에 계속 남아 있었고 그녀는 지긋지긋한 그 느낌을 없애고자 애썼던 것이다.
설명할 수 없는 이미지나 소리, 냄새, 통증, 촉감 등이 삶을 덮치는 ‘회상 환상’은 성적 트라우마 환자가 겪는 가장 두려운 경험의 하나다. 우울증, 공황장애, 마약과 알코올 중독도 그들의 인생을 망치곤 한다. 스스로의 몸에 칼자국을 내거나 화상을 입히는 자해행위 등 자기파괴적 행위도 한다. 결혼 생활도 파국을 맞는 경우가 흔하다.
더욱이 너무도 잊고 싶은 기억이라서 무의식 깊숙이 억눌러 본인조차 이런 트라우마가 왜 나타나는지 모르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따라서 우연한 계기로 그 기억이 떠오를 때 가까운 주변 사람이나 전문가들이 도와주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 대처에 따라 달라지는 인생… 긍정의 힘으로
거트루드는 유년 시절 내내 어머니 애인에게 상습적으로 강간을 당했다. 이 때문에 직장 괄약근이 파괴될 정도로 고통을 겪었다. 그녀는 항우울제 등을 복용했음에도 평생 환청과 환각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반면에 브렌다는 서너 살 때부터 아버지에게 성추행을 당했지만 이런 고통에도 불구하고 자라서 뛰어난 업무 능력을 유지했고 세 자녀를 훌륭하게 키웠다.
성적 트라우마의 희생자가 겪는 경험과 후유증은 다양하지만 이를 어떻게 이겨내는가에 따라 결과는 천양지차로 달라질 수 있다. 그 차이는 희생자가 주변으로부터 얼마나 체계적인 도움을 받느냐에 달려 있다.
하지만 자신의 자녀가 성적 트라우마의 피해자일지 모른다는 생각은 부모로서는 견디기 힘든 시련이다. 특히 자녀들이 그 사실을 숨기는 경우가 많기에 부모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 책은 의학전문가가 쓴 책답게 불안증세를 보이며 무단결석하거나 잦은 악몽에 시달리는 경우, 분노 발작을 일으키는 경우, 자해행위를 하는 경우 등 성적 트라우마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는 증상을 소개한다.
저자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아동 성학대에 대한 대중적인 인식의 전환이다. 가족은 물론 피해자 자신도 성적 트라우마에 대한 편견과 부정적인 시선을 버리고 삶의 한 부분으로 이를 인정하라고 주문한다. 그러면서 힘을 북돋아주는 위로를 건넨다. “당신과 같은 고통을 당한 사람은 당신뿐이 아니며, 또 그러한 일은 당신의 잘못 때문도 아니다. 오히려 그 몹쓸 경험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바로 그 경험 ‘때문에’ 풍부한 감수성과 창의성, 그리고 깊고 넓은 영혼을 지닌 특별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