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해영 (9) 언어 등 현지 적응도 전에 학교건물 짓느라 삽질

입력 2012-09-12 17:58


“자, 이 땅은 식당건물 자리입니다. 모두 같이 식당을 지읍시다. 먼저 바닥을 파 주세요. 가로 50㎝와 세로 80㎝입니다.”

조성수 선임선교사님이 교사들에게 지을 건물에 대해 설명한다. 주변을 둘러보니 물기하나 없는 땅위에 줄이 그어져 있다. 온통 모래로 둘러진 벌판엔 여기저기에 가시나무가 듬성듬성 서 있다. 나무 그늘 아래로 소떼와 양, 염소, 망아지들이 더위를 피하고 더러는 풀을 뜯고 있다. 보츠와나 4월의 모습이다. 이곳 햇살은 뜨거운 모래바닥을 불같이 달군다. 이 기온에도 아랑곳없이 한국인 선교사들은 삽이며 곡괭이를 들고 학생들과 공사에 나섰다.

나는 아프리카 남쪽 끝에 있는 보츠와나의 굿호프(Good Hope) 마을에 안착했다. 현지에 와 보니 언어연수와 현지적응은 사치스러운 말임을 알게 됐다. 대부분 한국인 선교사들은 도착하면 바로 현장에 투입됐다.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기’다. 뭐든지 생소했고 가만히 앉아서 쉬는 일조차 힘들었으며 항상 배고팠다. 오전에는 학생들과 수업을 하고 오후에는 함께 학교건물을 지었다. 그러고 나서 밤에는 다음 날 수업준비를 했다. 선교사들은 모두 공동체 생활을 했고 식사는 학생들과 똑같이 현지음식으로 먹었다. 보츠와나의 주식은 밀리밀(옥수수가루), 쇼감(수수), 캄푸(콩과 옥수수를 발효한 것) 등이다. 보통 이 음식을 약간의 감자와 양파, 소고기를 조각내 넣어 만든 걸쭉한 국물에 찍어 먹곤 했다.

먹고사는 일은 현지인들과 의사소통하는 일에 비하면 나은 편이었다. 영어, 한국말, 보츠와나 현지어인 츠와나어에 손짓발짓까지 써가면서 이들과 소통하는 일은 매 순간이 시트콤이었다. 생활환경도 변변찮아 ‘행복’ ‘만족’이란 단어가 결코 어울릴 수 없는 황무지의 삶이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 가슴을 뜨겁게 하는 일들이 서서히 생기기 시작했다.

‘적재적소’. 청소년들을 가르치는 과정에서 매 순간 느끼는 단어다. 아이들이 시시때때로 다가와 내게 말을 걸 때마다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이들은 내가 예쁘다고 했다. 처음에 이 말을 들을 땐 반신반의했다.

‘뭐! 내가 예쁘다고.’

그러나 이 믿을 수 없는 말들은 진심이었다. 동병상련이다. 홀아비심정은 과부가 안다고 했다. 보츠와나 사람들은 내 앞에서 흑인이라는 열등감과 자격지심이 사라졌다. 내 작은 키는 그들의 까만 피부와 곱슬머리와 상쇄된 듯했다. 내 앞에서 그들은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당당하고 자유로웠다. 학생들은 내게 다가와 친밀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고 내 손을 잡았다. 이는 장애인이라고 차별적인 대접을 받던 한국사회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일이었다.

“You are so beautiful!(당신은 아름다워요)”이란 말은 내 신체의 생김새보다 마음이 그들이 보기에 예뻤다는 말이었을 게다. 이들은 흑인이라는 열등감을 이해하고 편견 없이 사람으로 대접해 주는 내 태도에서 아름다움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어떻게 이들을 무지한 데다 까맣고 못생겼다고 무시할 수 있겠는가. 난 이들에게 무엇인가를 도와주러 갔다고 으스댈 수 없었다.

선한 곳에선 선한 열매가 열린다. 그들이 한 아름다운 말은 내 마음 깊은 곳에 가라앉은 아픔들을 치료해 줬다. 뿐만 아니라 ‘인간’이며 ‘여성’이라는 본연의 정체성에 자긍심을 갖게 해 주었다.

뜨거운 태양열에도 적응했고 힘에 겨워 죽고 싶던 노동일도 제법 손에 익었다. 낯선 환경에서 서투름이 많았음에도 일은 진행이 돼 학교도 제법 모양새가 잡혀갔다. 굿호프 학교는 보츠와나 청소년을 모아 양재, 목공, 편물 과목 기술을 2년 동안 가르쳤다. 또 정부에서 시행하는 기능자격시험 자격증 취득을 도와 졸업 이후 취업할 수 있을 길을 열어줬다. 첫해 졸업생 가운데는 두 명을 뽑아 한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어느덧 나는 네 번째의 신입생을 맞았다. 일은 잘 되어 가는 것처럼 보였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