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남북 당국, 수해 지원 문제 새 자세로 나서라
입력 2012-09-11 18:46
대북 원칙 훼손되지 않는다면 폭넓게 지원하길
북한이 지난 10일 판문점 적십자 채널을 통해 일주일 전 우리 정부가 보낸 대북 수해 지원 제의를 원칙적으로 수용하겠다는 답변을 통보해 왔다. 남측 당국과 상종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던 그동안의 북한 태도에 비하면 큰 변화다. 수해 상황이 그만큼 심각하다는 뜻일 수 있고, 경색된 남북 관계에 변화를 도모하겠다는 의지가 실려 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인도적 대북 지원에 대해서는 언제나 길을 열어둬 온 게 우리의 대원칙이다. 2010년 3월 천안함 피폭 사건 직후 5·24 조치로 대북 지원과 교류가 원칙적으로 보류됐지만, 순수한 인도적 지원은 예외로 유지돼 왔다. 정부가 대북 지원에 적극성을 보이는 것은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다.
문제는 북한이 우리 정부에 지원 품목과 수량을 미리 적어 보낼 것을 요구한 점이다. 편리한 시기에 편리한 장소에서 접촉하자는 제안에도 북측은 문서 교환 등 비대면(非對面) 접촉을 요구했다. 이는 지난해 수해 지원 방식과 관련한 불만 때문으로 보인다. 당시 우리 정부는 쌀과 시멘트, 복구용 중장비는 군사적으로 전용될 위험이 있다며 지원 품목에서 배제하고 초코파이·라면·유아 영양식 등을 지원하겠다고 통보했다. 북한이 이에 입을 다물어 수해 지원은 무산됐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면 올해도 쌀과 시멘트 및 중장비 지원 문제를 놓고 남북 간에 신경전이 벌어질 것으로 보인다.
천안함 사건 직후 극심한 남북 경색 국면에서 이뤄진 2010년 신의주 수해 복구 지원 때도 쌀과 시멘트가 포함됐던 사실은 이번 협상 과정에서도 고려돼야 할 것이다. 당시 정부는 쌀 5000t과 컵라면 300만개, 시멘트 1만t을 지원키로 해 연평도 포격 도발이 자행될 때까지 시멘트 7000t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북에 전달했다. 따라서 지원을 않겠다면 몰라도 한다면 쌀과 시멘트에 인색할 필요는 없다. 중장비 문제도 군수용 전용을 차단하는 방안을 놓고 협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북한도 지나친 요구를 접고 합리적으로 대화에 응해야 한다.
수해 지원이 남북 관계 개선의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게 대다수 국민들의 바람이다. 북한이 이산가족 상봉 같은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면 좋은 모멘텀이 될 것이고 당국간 대화나 금강산 관광 재개 등으로까지 연결될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근거 없는 낙관론으로 지나친 기대를 갖는 것은 금물이다. 천안함 사건 사과, 금강산 관광객 사고 방지책 등이 전제되지 않은 채 무턱대고 관계를 회복하자는 것은 대북 원칙을 훼손시키는 일이다. 원칙이 훼손되면 제2, 제3의 도발과 버티기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이번 수해 지원 문제는 김정은 체제 이후 처음으로 이뤄지는 남북 협의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북한의 새 체제에 인도적 지원에 관한 우리의 열린 자세를 보여주는 것은 좋은 출발이 될 것이다. 하지만 원칙 없는 태도는 잘못된 시그널을 주는 최악의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