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래 칼럼] 일본의 전후청산이 멈춰선 까닭은

입력 2012-09-11 18:44


“천황에 대한 면책에서 비롯… 미국의 의도적인 비호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

지난달 10일 이명박 대통령은 독도를 전격 방문했고 이어 14일엔 일본 천황이 한국을 방문하려면 사과부터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한 달이다. 이와 관련해 일본 여야 정치권은 물론 미디어까지 가세해 거세게 반발했고 양국 관계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본질적인 원인은 일본의 미흡한 전후청산 탓이다. 일본은 국제법상으로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침략전쟁의 책임을 갈무리했고, 65년 한·일 협정으로 양국 간의 모든 문제가 해소됐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이런 일본의 주장은 억지에 가깝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은 남북한 대만 중국 등의 참여가 없었기에 일방적인 결정이었을 뿐이다. 한·일 협정 역시 한국인 원폭피해자, 사할린 징용자, 일본군위안부 등의 문제는 논의조차 없었다. 일본의 전후청산 완결 운운은 법리·논리적으로 말이 안 된다.

더 중요한 것은 만주사변에서 패전에 이르기까지 15년 전쟁을 주도했던 히로히토 쇼와천황이 전후 그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연합국을 대표해 사실상 단독으로 패전국 일본을 점령한 미국과, 어떻게든 천황에 대한 책임 추궁은 막겠다는 가신들의 결탁이 있었다.

90년 11월 7일 일본 사회는 전 궁내성 관리 데라사키 히데나리(寺崎英成)의 유족이 가지고 있던 ‘히로히토 독백록’이 공개됐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내용인즉슨 히로히토가 46년 3∼4월 5회에 걸쳐서 궁중 가신 5명에게 15년 전쟁을 술회한 것이다.

요시다 유타카(吉田裕) 히토쓰바시대학 교수는 저서 ‘쇼와천황의 종전사’(1992)에서 독백록은 히로히토가 15년 전쟁의 흐름과 자신이 무관함을 주장하기 위해 작성됐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당시 연합국군사령부(GHQ)가 의도적으로 천황의 변명을 유도했다는 정황도 소개하고 있다.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관의 비서관이자 일본통인 보너 펠러스 준장은 46년 3월 초 천황의 중신 요나이 미쓰마사(米內重政)와 만나 천황 면책론이 먹혀들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논거가 필요하며 모든 책임을 육군참모총장 출신인 도조 히데키(東條英機)에게 떠넘겨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펠러스의 의도가 바로 궁중 가신들에게 전해졌음은 더 말할 나위 없다. 독백록은 그 직후에 나왔으니.

패전 직후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 내부에서 천황을 전범으로서 처벌해야 된다는 여론이 들끓었던 상황이고 보면 천황의 일본 내 영향력을 간파하고 이를 적극 활용하려 했던 GHQ는 사태 역전을 꾀하는 암수(暗數)를 낸 것이다. 이는 미국이 천황의 전쟁책임 회피를 적극적으로 옹호한 꼴이다.

결국 천황의 전쟁책임론은 없던 게 됐고 모든 책임은 강경파 군부에 씌워졌다. 문제는 이러한 패전 직후의 정황 속에서 전쟁책임을 모조리 군부에 떠넘기는 데 성공한 천황 가신들, 그들과 견해를 같이해온 자칭 ‘온건파’들이 ‘천황은 전쟁과 무관하다’는 일관된 주장을 줄곧 펴왔다는 점이다.

천황무오설에 동조하는 이들 온건파들은 이후 ‘전쟁책임론’ 운운 자체를 터부시하는 쪽으로 내몰아왔고 전후 일본 보수 정치가들의 역사인식도 딱 그 수준에서 멈추고 말았다. 이것이 일본의 전후청산이 멈춰 선 배경이다. 그 근본적인 배경은 천황의 면책에서 비롯됐다는 얘기다.

그러나 일반 대중의 인식은 조금 다르다. 히로히토가 병사한 직후 89년 1월 아사히신문 여론조사에 따르면 ‘천황의 전쟁책임 전혀 없다’는 응답은 31%였고, 그해 2월 교도통신의 조사에서는 ‘책임 있다’와 ‘어느 정도 있다’라는 응답의 합은 52.4%였다.

이 대통령의 ‘천황 사과 필요성’ 발언은 일견 정곡을 찌른 것이었으나 천황 면책과 전후 일본 보수정치권의 비뚤어진 역사의식의 깊은 연관성을 감안하면 순진한 접근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더구나 이 문제, 즉 전후청산은 일본 사회가 스스로 해결해가야 할 과제이고 이를 지적할 이는 한국 정부가 아니라 양국의 시민사회와 연구자들의 몫이다. 섣불리 벌집을 건드리는 것은 외교수장이 취할 바가 아니었다.

조용래 논설위원 choy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