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해영 (8) “일본 간다” 어머니 안심시키고 아프리카로…
입력 2012-09-11 21:37
‘얘, 너는 내게 마음을 바치겠다고 하지 않았니. 네 마음을 내가 가져가겠다는데 무슨 말이냐.’
하나님은 내가 드린 기도를 기억하고 계셨다. 십대 중반에 바친 마음, 가진 게 없어 마음을 드리겠다던 그 기도 내용대로 내 마음을 가져가겠다고 하신다. 이는 세상의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내 마음을 돌이키라는 의미였다. 그러던 중 기억 저편에서 아주 짧은 광고가 뚜렷하게 다가왔다.
‘아프리카 보츠와나에서 일할 양재, 편물 자원봉사자 모집. 1월 10일까지 연락 바람.’
대학입시에 실패하고 과로로 쓰러진 뒤 생각해 보니 과연 대학 진학만이 내가 가야 할 길인지 의문이었다. 세상살이는 피눈물 나는 노력을 하며 경쟁해야만 한다는 것을 나는 기능대회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경쟁을 계속하며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피곤했다. 결국 경쟁사회에서 나는 ‘원 오브 뎀(one of them)’일 뿐이다. 수많은 인생 중 하나인 셈이다.
‘그래, 이 문이 안 열리면 저쪽 문을 열면 되겠지. 아프리카 보츠와나, 거기가 어딘데요?’
일종의 서원기도까지 한 나는 더 이상 발뺌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한국에서 온갖 노력을 기울이며 성공을 좇다 허망하게 죽을 인생이라면 차라리 하나님께서 시키는 일을 하다가 죽는 게 기독인으로서 명분 서는 일이다.
하지만 그 일은 월급이 없다. 황무지이며 아무도 가려고 하지 않는 곳이다. 가장자리이며 단두대가 될 수도 있다. 장래가 전혀 보장이 안 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곳이다. 그런 자리이기에 무엇보다도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나는 즉시 움직였다. 그 기사를 본 날이 1월 15일인데 그 다음날 광고를 낸 선교부에 찾아갔다. 그곳의 이름은 그루터기선교부로 평신도를 훈련시켜 해외로 파송하는 곳이었다. 마감은 10일이었지만 때마침 편물교사로 지원하는 사람이 없어 자리가 비어 있는 상태였다. 내 이력과 경력을 듣고 난 선교부 담당자는 한마디로 인터뷰를 끝냈다.
“당신은 이 일을 위해 준비된 사람 같군요. 따로 훈련 받을 필요도 없네요. 학교가 2월 20일 개학하니 지금 준비해서 가십시오. 문제 있습니까?”
1990년 2월 17일. 동생들에게는 “여기까지만 돕겠다. 나머지는 알아서 해라”라고 말하고 사정을 이해하지 못할 엄마께는 “일본에 다녀온다”고 설명한 뒤 아프리카행 비행기에 올랐다. 무보수 자원봉사자가 돼 생전 처음 들어본 나라인 보츠와나에서 편물기술교사가 되기 위해 떠난 것이다. 김포를 출발해서 홍콩-태국-모리셔스-요하네스버그-가보로니까지 다섯 번이나 갈아타야 하는 긴 여정이었다.
위기의 다른 말은 기회다. 성공을 향해 달려가다 쓰러져서 인생의 위기를 맞았을 때, 나는 인생의 방향을 180도 틀어 기회로 만들었다. 누구와도 의논하지 않고 오직 내 의지와 신념, 믿음에 근거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주님을 위해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마 16장 25절)는 성경말씀은 살아있다. 나는 살기 위해 아프리카에 가지 않았다. 해충과 독사에 물려 죽거나 아사해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떠난 길이다. 경쟁사회에서 피나는 노력을 기울이는 대신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살면 인생에 보람은 있을 것이란 생각에 떠났다.
서울에서 잘 나가는 기술자 생활을 접고 보츠와나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원 오브 뎀’에서 ‘온리 원(Only One)’, 수많은 인생 중 한 명에서 ‘유일한 인생’이 되었다. 적어도 그 무렵 나는 보츠와나에서 최고의 기술자였다. 내 손을 잡고 기도한 인미자 사모님의 세 번째 기도가 정확하게 이루어졌다. 기능인 선교사로 하나님의 일꾼이 된 것이다. 내 일터는 생면부지의 드넓은 황무지 칼라하리 사막 땅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부시맨이었다.
정리=양민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