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성기철] 이 대통령 탈당 나쁘지 않다

입력 2012-09-10 18:50


1992년 9월 18일 오전 11시 청와대.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민자당 대통령 후보가 마주앉았다. 냉기류가 회담장을 휘감았다. 노 대통령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김 총재, 오늘은 내가 중요한 결정을 하나 해야겠어요. 연기군(郡) 관권선거 시비로 온 나라가 시끄러운데 내가 중대한 결심을 하나 해서 분위기를 확 바꿔볼까 합니다. 12월 대선을 앞두고 중립내각을 구성하되 공명선거를 국민들에게 약속한다는 차원에서 내가 민자당을 탈당할까 해요.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김 후보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같은 해 5월 집권당 대선 후보가 된 뒤 인기 없는 대통령을 무차별적으로 비판하는 차별화 전략을 구사하다 뒤통수를 맞은 것이다. 김 후보가 민자당과 선거대책위원회의 혼란을 걱정하며 탈당을 강력히 만류했으나 노 대통령의 결심은 확고했다. 현직 대통령의 임기 말 탈당은 이렇게 시작돼 뒤이은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때도 관행처럼 반복됐다.

관권선거 시비 차단에 특효

역대 대통령의 대선 전 탈당은 한 번도 바람직하다는 평가를 받지 못했다. 네 번 모두 자신이 직접 만든 당에서 쫓겨나다시피 했으니 정상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잘못된 정치문화의 산물인 데다 대통령제 국가에서 책임정치를 포기한 것이란 비판이 어김없이 뒤따랐다. 대선을 한참 앞둔 5월과 2월에 각각 탈당한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에겐 비난의 강도가 특히 컸다.

18대 대선을 3개월여 앞둔 지금 또다시 대통령의 탈당 여부가 관심사로 부각됐다.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가 지난 2일 회동한 이후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에서 탈당론이 흘러나오고 있다. 박 후보 측근들 중에는 차제에 인기가 땅에 떨어진 대통령의 탈당을 요구해야 한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고 한다. 야당의 ‘이명박근혜’ 공세를 차단하기 위해서는 하루빨리 갈라서는 게 낫다는 판단일 게다. 그러나 원칙과 의리를 중시하는 박 후보가 반대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민주당의 경우 아직 탈당에 대한 입장이 정리되지 않은 것 같다. 민주당 입장에서 보면 이 대통령의 탈당이 정부의 박 후보 지원을 차단하는 데는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박근혜 책임론 공세를 일정부분 포기해야 하는 단점이 있다.

어쨌든 현재의 정치권 분위기를 종합해 보면 이 대통령이 탈당을 강요당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하지만 대통령이 당적을 가진 상태에서 선거를 치르는 것이 반드시 바람직한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집권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우리나라 대선 행태를 감안할 때 대통령의 당적 보유는 관권선거 시비를 불러 올 가능성이 매우 높다. 대통령이 엄정중립 의지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당적 보유 자체가 야당의 공격 빌미가 될 수 있다. 탈당해 버리면 이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다. 대통령이 탈당한 과거 네 번의 대선 때 관권선거 논란이 전혀 없었다는 것은 시사점이 크다.

임기말 국정 전념하는 데 도움

대선 정국에서 대통령이 탈당하면 정쟁에서 비켜나 임기 말 국정에 전념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다. 오직 국리민복을 위해 소신껏 일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겠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으로서는 새누리당 당적을 갖고 있다 해서 특별히 도움 될 것도 없어 보인다. 최근의 ‘내곡동 사저 특검법’ 통과가 이를 증명한다. 차라리 자진탈당을 통해 정치적 중립을 선언하는 것이 대과(大過) 없이 임기를 마무리하는 데 보탬이 되지 않을까 싶다.

대통령의 공정한 선거관리를 담보하기 위해 대선 6개월, 혹은 3개월 전 당적포기를 법제화하자는 새누리당 홍문종 의원의 제안(6일 국회 대정부질문)도 새겨들을 만하다.

성기철 편집국 부국장 kcs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