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이춘근] 한국의 지정학적 고뇌
입력 2012-09-09 19:44
중국이 진정 미국과 맞먹는, 혹은 그 이상의 강대국으로 부상하게 될 경우 한국이 당면할 지정학적 고뇌는 생각보다 훨씬 힘든 것이 될 것이다. 2012년 2월 출간된 ‘전략적 비전(Strategic Vision)’이라는 책에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이었으며 저명한 국제정치학자인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교수는 “미국이 쇠퇴하면서 야기될 세계 패권질서 변화로 지정학적 위험에 빠질 가장 대표적인 나라가 한국”이라고 주장했다.
브레진스키 교수는 “미국의 쇠퇴는 한국으로 하여금 고통스러운 선택에 직면하도록 할 것이다. 한국은 첫째, 중국의 지역적 패권을 받아들여 중국에 종속해서 사는 방안과 둘째, 역사적 반감에도 불구하고 일본과의 관계를 더 강화하는 방안, 마지막으로 핵무장을 포함해 스스로의 힘으로 생존을 강구하는 방안 등 세 가지 어려운 전략적 선택에 당면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세 가지 중 “일본과의 안보협력을 강화한다는 전략적 선택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단언한다. 한·일 안보협력이 미국에 가장 덜 위협적이기 때문에 미국은 이를 지지할 것이며, 이 한·일 안보협력은 동북아 안정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한국이 중국의 ‘영향권’ 아래 들어가 ‘종속적인 상태’가 될 수 있다고 말한 것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는 한국인이 많을 것이다. 미국이 중국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무엇보다 거리상으로 한국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거리상 멀리 있는 미국은 ‘전략적 이익(Strategic Interest)’에 따라 한국을 대하게 된다. 그러나 지리적으로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중국은 한국에 대해서 ‘영토적 이익(Territorial Interest)’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이 우리에게 피곤한 강대국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중국이 미국보다 강압적, 공격적이기 때문이라기보다 우리와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다는 지정학적 요인 때문이다. 때문에 힘이 상대적으로 약한 우리가 중국과 상호거래를 할 때 우리는 중국에 종속될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약한 나라가 강대국과 동맹을 맺을 경우 그 강대국은 가까이 있는 나라여서는 안 된다는 지정학적 철칙이 나오는 것이다. 이 같은 지정학적 철칙은 우리나라의 경우 한·미동맹이 최선의 선택임을 말해준다.
일본과의 안보협력 강화를 한국이 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전략적 선택이라고 보는 이유는 현실주의적 국제정치학에 기반한 분석 결과다.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은 국제관계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고 다만 영원한 국가이익이 있을 뿐이라고 가정한다. 지금 동북아에서 가장 위협적인 나라는 국력이 일취월장하는 중국이다. 오늘의 중국은 마치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반 일본이 아시아에서 담당했던 역할을 반복하고 있다. 일본이 두려울 때 우리는 중국에 더욱 의존하곤 했다. 거꾸로 점차 중국이 두려워지는 오늘의 상황에서 미국이 정말로 쇠퇴한다면 우리가 택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은 일본과 안보협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국제정치를 극도로 정서적(情緖的)인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는 우리나라 국민들이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이 제시하는 전략적 선택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중국보다 훨씬 막강한 미국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과 일본은 아직도 독도를 둘러싸고 갈등을 벌일 여유가 있는지 모른다.
전략이란 다가올지도 모를 불리한 상황에 대비하는 것이다. 미국이 진정 쇠퇴하는 경우 우리는 중국과 일본 두 나라 모두를 적대시하는 전략적 파탄 상황을 절대로 피해야 한다. 일본과의 안보협력이 정말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핵무장을 포함해 군사적 수단을 대폭 강화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을 것이다.
이춘근(한국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