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태원준] 군용텐트
입력 2012-09-09 19:42
‘제곧내’의 말뜻을 모른다면 당신은 ‘자게이’가 아니다. 인터넷 커뮤니티 자유게시판에서 제목 옆에 이 말이 붙은 글은 클릭할 필요가 없다. ‘제목이 곧 내용’이니 굳이 읽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냉무’(내용 없음)의 새로운 버전쯤 된다. 이런 은어를 통용할 만큼 수시로 자유게시판에 들락거리는 이들을 자게이(자유게시판 이용자)라고 한다. ‘멘붕’(멘탈붕괴) 역시 자게이들이 쓰던 말이다. 이들이 주로 활동하는 커뮤니티로는 디시인사이드, 오늘의 유머, MLB파크, SLR클럽 등이 있다.
사진 동호회인 SLR클럽 자유게시판에 지난달 30일 뜬금없이 “24인용 군용텐트 혼자 치기 가능할까?”란 글이 올라왔다. ‘벌레’란 별명을 쓰는 자게이가 “육군 8년 복무하고 전역했는데, 저 칠 수 있습니다”라고 답하자 수천개 댓글이 달리며 “칠 수 있다” “없다” 공방이 벌어졌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타고 확산된 논쟁이 너무 뜨거워서 국방부 트위터 대변인까지 “어려울 것”이라는 ‘입장’을 밝혀야 했다. “그래? 그럼 한번 해보자”하면서 시작된 게 지난 8일 서울 신월동 신원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T24(24인용 텐트를 뜻함) 페스티벌’이다.
온라인 게임 업체가 24인용 군용텐트를 후원해 ‘벌레’ 이광낙(29)씨가 텐트 치기에 도전했다. 여기저기서 후원품이 답지했고, 가수 렉시가 자원해 응원공연을 했다. 개그맨 남희석은 “성공하면 호텔 숙박권 쏜다”고 약속했다. 이씨가 정말 텐트를 칠 수 있나 보려고 2000명이 모였다. 인터넷 방송에 생중계되는 가운데 1시간20분 만에 24인용 텐트가 완성됐다. 각종 SNS에 축하글이 쇄도했고, 결국 지상파 TV 메인뉴스에까지 보도됐다. 자게이들은 이를 최초의 ‘소셜 축제’라고 자평한다.
그런데, 여기서 24인용 텐트가 군용이 아니라 그냥 텐트였다면 이런 축제가 벌어졌을까. 이씨가 ‘육군 8년 복무’(중사 출신이라고 한다)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면 이렇게 논쟁이 커졌을까. 논쟁에 가담한 이들은 다 한마디씩 했다. “나도 군대에서 24인용 텐트 쳐봤는데….” 군용텐트 도면을 올린 이도 많고, 용마루·지주대 같은 ‘전문용어’도 숱하게 등장했다.
군대는 한국 남성이면 누구나 한 자락 걸칠 수 있는 소재다. 이 한바탕 놀이는 SNS가 아니라 ‘군대의 힘’이었다.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건 SNS란 형식보다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고, 이것은 곧 벌어질 선거판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태원준 차장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