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이명희] 따뜻한 법정

입력 2012-09-07 18:16

뉴욕시장을 세 번이나 역임한 피오렐로 라과디아는 그의 이름을 딴 공항이 세워질 정도로 미국인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그가 판사로 재직하던 1930년 겨울 어느 날, 상점에서 빵을 훔쳐 절도혐의로 기소된 노인을 재판하게 됐다. 노인은 사흘을 굶다보니 배가 너무 고파 빵을 훔쳤다고 했다. 라과디아는 “아무리 사정이 딱해도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은 잘못”이라며 1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했다.

그러면서 “이 노인이 빵을 훔쳐야 할 정도로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 이 도시 사람들에게도 책임이 있다. 그동안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어온 내가 벌금 10달러를 내겠으니 이 자리의 여러분도 각각 50센트씩 벌금을 내라”고 선고했다. 금방 57달러 50센트가 모였고, 라과디아는 벌금 10달러를 제외한 나머지를 노인에게 주었다.

남학생들에게 집단폭행을 당한 뒤 후유증으로 범죄에 빠져 2010년 4월 법정에 선 16살 여학생에게 서울가정법원 김귀옥 부장판사는 자신을 따라 힘차게 외치라고 주문했다.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나는 이 세상에서 두려울 게 없다. 이 세상은 나 혼자가 아니다.” 그는 “이 아이의 잘못이 있다면 자존감을 잃어버린 것”이라며 아무 벌도 내리지 않았다.

서울고법 조경란 부장판사는 그제 성적 때문에 체벌하는 엄마를 살해한 혐의로 구속기소된 19살 지모군 항소심에서 1심대로 실형을 선고하며 눈물을 흘렸다. 조 판사는 “비록 피고인을 아버지 품으로 돌려보내지는 못하지만 어미의 심정으로 하나님께 피고의 장래를 위해 기도할 것을 약속한다”고 했다.

얼마 전 사임한 김영란 전 국민권익위원장은 2년 전 대법관을 퇴임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판단하고 처벌하는 판사로서 얼마나 힘든 사람들을 위로해 주었는지, 얼마나 슬픈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었는지, 얼마나 답답한 사람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었는지 항상 자문해 왔다.”

판사들에겐 선고가 일상이지만 피고인들에겐 일생을 좌우한다. ‘유전무죄(有錢無罪)’ 판결이나 뇌물수수로 신문에 오르내리는 판사들이 있는 반면 죄는 엄하게 다스리되 약자와 빈곤층을 보듬을 줄 아는 가슴 따뜻한 판사들이 있어 아직은 살 만한 세상이다.

이명희 논설위원 mhe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