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죄, 이대론 안된다] “한국 성폭행 발생 때 화만 내… 국가가 죄책감 가져야”

입력 2012-09-06 18:09


“나주 성폭행 같은 사건이 벌어지면 국가가 죄책감을 가져야 한다. 대체 사회가 뭘 잘못했기에 저런 일이 벌어졌을까. 한국에서는 ‘저 놈 죽여라’며 나라 전체가 화를 낸다.”

지난 달 30일 전남 나주의 7세 여아 성폭행 사건 후 일주일. 여론은 강력 처벌에서 시작해 화학적 거세를 거쳐 물리적 거세, 사형 집행까지 격화됐다. 2004년부터 영국 옥스퍼드 시의 의료기관 운영체 ‘옥스퍼드 헬스 트러스트’ 소속의 아동·청소년 담당 정신과 의사 우이혁(45) 박사는 “영국에서라면 조사부터 했을 것”이라며 “몇 주 만에 대책을 급조하면 같은 일은 또 일어난다”고 말했다. 학술 세미나를 위해 한국을 방문한 그를 4일 만났다.

-영국 정부의 대응은 달랐을까.

“2000년 2월 아프리카 출신의 8살 소녀 빅토리아 클림비에가 가족에게 학대받다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영국인들은 경악했다. 여기까지는 한국과 비슷하지만 그 뒤 아주 다른 일들이 벌어졌다. 정부는 독립 조사팀을 꾸려 2001년부터 1년간 380만 파운드(약68억5000만원)를 들여 장기조사를 벌였다. 2003년에는 400쪽 짜리 보고서를 발간했다. 그리고 나서야 ‘어린이헌장2004’ 같은 아동 보호정책들이 줄줄이 나왔다. 영국인들은 묻고 또 물었다. 우리가 왜 그 아이를 지키지 못했나. 사회가 무엇을 잘못해서 그 아이를 잃었나.”

-어떤 범죄는 타고난 악인의 소행처럼 보인다. 강력한 처벌을 말하는 배경이다.

“처벌은 중요하다. 아동 상대 범죄는 더 무겁게 다뤄야 한다. 하지만 처벌이 해결책은 아니다. (가해자 고종석은) 중학교 때 학교를 그만뒀다고 하더라. 왜 학교를 뒀는지, 언제 엇나가기 시작했는지 따져야 한다. 만약 어렸을 때 학업을 마치도록 격려하고, 문제행동을 했을 때 상담과 진료를 통해 고치도록 도왔다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세상에 원래 악인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한국에도 돌봄제도는 많지만 구멍이 많은데.

“술 마시고 아내를 때리는 실직자 아버지와 밤늦게까지 일하는 어머니가 있다고 해보자. 아동복지센터가 돌본다고 해도 결국 아이는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 뒤는 누가 책임지나. 일단 폭력 아버지는 처벌해야 한다. 그리고 어머니에게는 수당을 지급해 일을 줄이고 애를 돌볼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물론 돈이 든다. 하지만 한국은 더 이상 가난한 나라가 아니다. 불행한 가정에서 방치된 채 자라는 아이들이 내 자녀와 같은 반, 같은 마을, 같은 사회에서 살아간다.”

-빅토리아 사건 후 어떤 변화가 있었나.

“정신과 의사가 학대 가능성이 있는 아동 환자를 경찰 아동학대팀에 신고하지 않으면 처벌 받는다. 담당 환자가 자살해도 조사를 받는다. 학생 환자라면 교사에게 주의사항을 담은 편지를 쓰고, 필요한 경우 교사와 미팅도 해야 한다. 한국에서 정신과 의사가 학교를 찾아가면 교사들은 정말 놀라지 않겠나. 정신과 의사, 교사, 카운슬러 등은 서로 360도 다면평가를 한다. 사건 후 이런 협조 및 감시 시스템이 정착됐다.”

글·사진=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