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사의 풍경] 시인 오장환과 모스크바 볼킨병원

입력 2012-09-06 18:38


신장투석 와중에도 모스크바 거리 활보한 ‘한국판 예세닌’

오장환(1918∼1951)은 병상의 시인이다. 그가 활동한 1930∼40년대 일제 치하와 해방기라는 시대적 배경 자체가 당대 문학의 병상일 수도 있다. 실제로 그는 병상에서 쓴 작품을 많이 남겼다. 해방도 병상에서 맞이했다. “8월 15일 밤에 나는 병원에서 울었다./ 너희들은 다 같은 기쁨에/ 내가 운 줄 알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일본 천황의 방송도,/ 기쁨에 넘치는 소문도,/ 내게는 곧이가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저 병든 탕아로/ 홀어머니 앞에서 죽는 것이 부끄럽고 원통하였다.”(‘병든 서울’ 부분)

해방 직후에 쓴 ‘병든 서울’은 그의 세 번째 시집 제목이기도 하다. 해방을 전후해 그는 신장병 치료차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당시 그를 병문안 온 지인 가운데는 화가 이중섭도 있었다. 시인 김광균(1914∼1993)은 해방 후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있던 오장환을 문병하러 갔다가 이중섭을 처음 만난 뒤 절친한 사이가 돼 이후 이중섭을 알게 모르게 도와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중섭의 ‘욕지도 풍경’과 ‘봄’은 한때 김광균이 소장했던 작품이기도 하다.

이런 문병인들의 도래는 오장환의 입원 기간이 상당히 길었음을 반증한다. 아예 ‘입원실에서’라는 시도 있다. “저마다 기쁜 마음, 싱싱한 얼굴로/ 오래니 있었던 병실에서/ 나가는 사람들./ 그러는 동안에/ 해방을 기약하는 그날이 왔고,/ 그 뒤에도 잇대어 여러 가지 병든 사람이나/ 흥분된 감격에 다쳐 온 젊은이/ 새로이 새로이 왔다는/ 모두 다 씩씩한 얼굴로 나간다.”(‘입원실에서’ 부분)

충북 보은군 회북면에서 해주 오씨 오학근과 어머니 한학수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친모가 오학근의 첩이었던 관계로 서자의 슬픔을 안고 세상을 출발했다. 1931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던 해, 아버지의 본처가 사망한 것을 계기로 적출이 된 오장환. 그는 본의 아니게 자신의 출생 속에 시대의 아픔을 가지게 된 것이니 어쩌면 해묵은 전통인 족보를 거부하고 무산계급을 추종하게 됐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친모에게만은 효자 중 효자였다.

“어머니 서울에 오시다./ 탕아 돌아가는 게/ 아니라/ 늙으신 어머니 병든 자식을 찾아오시다.// (중략)// -이것아, 어서 돌아가자/ 병든 것은 너뿐이 아니다. 온 서울이 병이 들었다./ 생각만 하여도 무섭지 않으냐/ 대궐 안의 윤비를 어디로 가시라고/ 글쎄 그게 가로 채였다는구나.// 시골에서 땅이나 파는 어머니/ 이제는 자식까지 의심스런 눈초리로 바라보신다./ 아니올시다. 아니올시다./ 나는 그런 사람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어머니 서울에 오시다’ 부분)

1946년 3월 12일에 쓴 이 시를 마지막으로 서울대병원에서 퇴원한 그는 1947년 6∼7월 문화공작단으로 활동했다. 남조선 문화단체총연맹 소속 여덟 개 단체 예술가 200명 가운데 일원이 돼 전국방방곡곡을 돌았던 그는 이 순회공연의 목적을 수기 ‘남조선의 문화예술’에서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의 속개에서 더욱이 비등된 민주 역량과 이를 축하하기 위함”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하지만 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문화예술인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과 테러가 자행되면서 당한 집단구타와 신장병으로 몸을 가눌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오장환은 1947년 하반기에 월북, 평안남도 남포에 있는 소련적십자병원에 입원한다. “나의 병실 남으로 향한 창에는/ 해풍이 조을고/ 부두 앞으로 나아간 곡물창고/ 여기에 모이는 참새떼는/ 자주 나의 창에 앉았다 갑니다// (중략)// 이럴 때이면 오랫동안 비꾸러진 나의 마음이/ 몰래서 우는 것이 아니라/ 내 고향 먼 곳에 계신 어머니시여!/ 당신이 목마르게 그리워집니다”(‘남포병원’ 부분)

오장환은 이후 소련군정의 배려로 모스크바 볼킨병원으로 옮겨가지만 그의 모스크바행에 대해선 아직까지 속 시원히 밝혀진 게 없다. 유일한 단서가 1950년 5월 북한에서 발행된 그의 다섯 번째 시집 ‘붉은 기’이다. ‘붉은 기’에 따르면 오장환은 1948년 12월 열차 편으로 하바롭스크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1929년 외국의 간섭군과 싸워 하바롭스크를 사수한 인민 영웅 김유천 거리를 둘러본 뒤 ‘하바롭스크 크라이(구역) 콤(코뮤니스트) 강사실’에서 유숙하며 항공 스케줄을 기다리다가 이윽고 32인승 항공편으로 시베리아 상공을 날아 모스크바에 도착한다.

볼킨병원 입원 기간은 1949년 1월부터 7월까지로 추정된다. 그는 신장 투석을 받았을 것이다. 신장 기능이 50% 내지 25%로 저하됐을 때 최소한 일주일에 한 번 혹은 이틀에 한 번 꼴로 받아야 하는 게 신장 투석이다. 고질적인 신장병 환자인 오장환은 장기간에 걸쳐 신장 투석을 받는 동안, 전해질과 요독을 정상적으로 배출하지 못해 몸이 붓는 부전증세를 보였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신장 투석이 없는 날에는 모스크바 시내를 자유롭게 활보했다.

‘붉은 기’에 수록된 ‘레닌 묘에서’의 창작 일자는 1949년 3월, ‘올리가 크니페르’는 1949년 2월로 적혀 있다. 그는 입원 중에도 짬을 내어 붉은 광장의 레닌 묘를 찾아가고, 작가 안톤 체홉의 부인이자 소련 인민여배우 올리가 크니페르의 연극을 관람하기 위해 모스크바예술극장을 찾아갔던 것이다. ‘고리키 문화공원에서’ ‘김일성 장군 모스크바에 오시다’ ‘모스크바의 5·1절’ 등의 시에는 현장감이 물씬 풍긴다.

‘붉은 기’ 수록 시편 가운데 가장 늦은 창작 일자는 ‘크라스노야르스크’를 쓴 1949년 8월이다. 그는 시베리아횡단열차 편으로 크라스노야르스크를 거쳐 귀국했던 것이다. 오장환이 언제 어디에서 러시아어를 배웠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1946년 6월 서울 동향사에서 ‘예세닌 시집’을 번역 출간했을 만큼 그는 능통한 러시아어 구사자였다.

1949년 가족과 함께 북으로 간 시인 조운(1900∼?)은 시집 ‘붉은 기’ 발문에 이렇게 적었다. “장환이 소련에 다녀왔다. ‘나는 언제나 한번 가보나!’하고 모두들 동경하는 소련에 다녀온 장환이 여장을 풀면서 우리들 앞에 선물로 내놓은 것이 이 시집이다. 장환의 소련행은 우리 공화국을 대표한 사절도 아니요 문화연구를 위한 시찰도 아니요 호화로운 만유(漫遊)나 우정의 시를 지으려고 간 것은 더욱 아니다. 우방의 한 젊은 예술가에게까지도 알뜰히 관심을 놓치지 않는 위대하고도 자애로운 소련은 우리들의 아끼는 장환, 이 젊은 시인의 병이 다스리기 어려운 중세임을 알자 고쳐주려고 데려간 것이다. 위대한 소련이 예외의 우우(優遇)와 분에 넘치는 온정에 장환은 병구를 이끌고 모스크바의 품에 안기었던 것이다. -1950년 5월.”

하지만 오장환은 한국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1951년 3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한국전쟁 중 오장환과 우연히 조우했던 김광균에 따르면 그는 북으로 가서도 감시 대상이었다. 보위부 사람들이 아침저녁으로 들러 보고를 받고 있어 감옥살이하는 것 같다고 털어놨다는 것이다.

오장환을 떠올리자면 그는 모스크바 볼킨병원 침상에 누워 ‘예세닌 시집’을 읽고 있다. 잠이 오지 않을 때, 혹은 새벽에 잠이 깬 그의 눈동자는 시인 세르게이 예세닌의 시 ‘어머니의 편지’를 쫓아간다.

“어머니는 쓰고 계신다-/ ‘형편이 되거들랑 너, /크리스마스주간에 말이다/ 한 번 오너라/ 나한테 목도리를/ 아버지한테 바지를 사다 다오./ 우리 집은 여간 옹색하지가 않구나.// 네가 시인이라는 것이,/ 네가 좋지 않은 평판과/ 어울리고 있는 것이/ 나로서는 여간 뜨악하지 않구나./ 어렸을 적부터/ 쟁기질이나 하여 밭을 가는 것이/ 훨씬 더 나았을 것을’// (중략)// 나는 편지를 마구 구깃거리고,/ 나는 오싹 소름이 끼침을 느낀다./ 그래 내 가슴 속에는 숨겨진 길에는/ 출구가 없는 것인가?/ 그러나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을/ 나는 나중에 이야기하리라./ 나는 말하리라/ 답장의 편지로…”(박형규 번역 예세닌 서정시집 ‘자작나무’에서)

오장환을 한국판 예세닌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10월 혁명의 와중에서도 사회주의적 일체감보다 농민들의 서정적 진실에 경도됐던 예세닌과 오장환의 시를 비교해 읽으면서 종종 시대착오를 일으키는 것은 어머니에 대한 두 시인의 애절함이 여전히 심금을 울리기 때문이다.

오장환은 누구

1918년 충북 보은 출생. 휘문고보 졸업, 일본 메이지대학 수학. 1931년 ‘조선문학’으로 등단. 광복 이후 현실참여적인 시를 쓰다가 월북. 시집 ‘성벽’(1937), ‘헌사’(1939), ‘병든 서울’(1946), ‘나 사는 곳’(1947), ‘붉은 기’(1951)와 번역 시집 ‘예세닌 시집’(1946) 등이 있다.

◇자문교수(가나다순)=유성호(한양대) 이상숙(가천대) 최동호(고려대·한국비평문학회장)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