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피할 곳 없는 우리시대 가장의 내면… 이재무 시선집 ‘길 위의 식사’

입력 2012-09-06 18:22


“그의 근작시들은 삶 그것의 내포와 심도를 담아왔고 안정감과 모종의 우수도 엿보인다.”(김남조 시인) “하필 그 시인을 수상자로 뽑았느냐고 물을 경우 가장 상식적이고 필연적인 대답은 ‘그 시인의 시가 제일 좋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 이외에 다른 말이 있을 수 없다.”(오세영 시인)

1983년 무크지 ‘삶의 문학’으로 등단, 시인으로서의 닻을 올린 지 30년 만에 제27회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한 이재무(54·사진) 시인의 시선집 ‘길 위의 식사’(문학사상)에 수록된 촌철살인의 심사평이다. 이재무는 맬더스 ‘인구론’으로 볼 때 ‘항아리’ 도표의 한 가운데를 차지하는 세대인 1958년 개띠 생이다. 게다가 충남 부여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장항선을 타고 상경한 이른바 ‘장항선 시인군’의 한 사람이다. 퇴색된 장항선 간이역 내벽에 적힌 낙서처럼 그는 소월시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오랜 추억을 머금은 또 하나의 문학적 간이역을 지은 것이 된다.

“나의 이십 대는 무모한 소비였으나 아름다운 열정의 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이십 대를 인생의 긴 도정을 위한 준비기간으로 삼지 못했다.”(‘문학적 자서전’에서)

대학 3학년 때 ‘오월시’ 동인들과 의기투합해 만든 교육무크지 ‘민중교육’에 ‘교사 임용 이대로 좋은가’라는 현장 르포를 기고하는 바람에 블랙리스트에 올라 교사자격증을 획득하고도 교사에 임용되지 못한 그는 청주와 대전 등지에서 학원 강사를 전전하다가 시인이 됐다. 그의 시에서 종종 지울 수 없는 과거 때문에 울고 있는 사내가 등장하는 것은 이에 기인한다.

“둥둥, 생활이 저만큼 떠내려간다 그러나 나는 안다 언제고 물 밖 벗어나는 순간 생활은 예의 뻔뻔한 얼굴로 돌아와 내가 한 집안의 책임 많은 가장임을 깨쳐주리라는 것을 벌써부터 아이들은 가재잡이에 몰두해 있다 나도 슬슬 게으르게 일어나 그들 찾아나선다”(‘가재는 일급수에서 산다’ 부분)

시의 화자인 사내는 한순간 ‘생활’이 둥둥 떠내려가는 것을 지켜본다. 본다는 것은 분리돼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는 가재처럼 일급수에 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른 채 가족을 부양해야 할 가장으로 돌아온다. 도피는 그에게 순간의 일일 뿐이다. 그는 어김없이 삶의 시간으로 귀환해 있다. 우리 시대의 우울한 생활의 배후를 ‘내포와 심도’를 통해 보여주는 시선집이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