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염성덕] 판사야, 아바타야

입력 2012-09-06 19:05

소명의식, 사명감, 정치적 중립, 공정성, 객관성, 한없는 책임과 의무, 전문지식…. 판사의 자격을 꼽으라면 열 손가락으로도 부족하다. “판결하는 직장인이 아니라 재판을 받는 사람들에게 신적인 존재로까지 비칠 만큼 특별한 존재”라는 양승태 대법원장의 말은 판사라면 곱씹어봐야 한다.

하지만 최근 미국 버지니아주 동부법원에서 코오롱-듀폰 소송을 담당한 로버트 페인 재판장은 이런 판사의 자격과는 거리가 멀다. 첨단기술을 모르고 듀폰 공장이 있는 지역의 주민이 대부분인 배심원들이 약 1조400억원의 배상 평결을 내리자 페인 판사는 이를 그대로 수용했다. 코오롱이 미국에서 30억원가량의 첨단섬유 헤라크론을 팔았는데 300배 이상의 배상금을 내라는 판결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페인 판사는 배심원들의 아바타란 지적을 받아도 싸다.

듀폰은 자사 직원 출신 컨설턴트와 코오롱 사이의 계약을 영업비밀 침해 증거로 제시했다. 하지만 코오롱이 해당 컨설턴트와 계약하기 2년 전에 이미 헤라크론을 생산했기 때문에 듀폰의 주장은 아귀가 맞지 않는다. 페인 판사가 듀폰의 주장을 받아들인 이유가 궁금하기 짝이 없다. 페인 판사는 이번 소송에서 듀폰을 대리한 로펌에서 21년간 일한 경력이 있다. 코오롱 변호인단이 판사 기피신청을 낸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가 적시한 판매 금지 기간 20년도 상식 밖의 판결이다. 그는 “코오롱이 20년 동안 헤라크론을 개발하지 못하다가 듀폰의 영업비밀을 도용해 제품을 만들었다”고 지적하고, 코오롱이 기술개발에 뛰어든 1985년부터 생산을 시작한 2005년까지의 20년을 판매 금지 기간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의 판결은 미 대법원의 판례에도 위배된다. 대법원은 2006년 인터넷 경매사이트 이베이와 네트워크 시스템 개발업체 머크익스체인지의 특허 침해 소송에서 이베이가 특허를 침해한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해당 특허권의 사용금지 명령은 기각했다. 대법원은 “즉각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금전적 손해를 입게 된다는 점을 입증해야 금지 명령을 내릴 수 있다”는 요지로 판결했다.

말썽의 소지가 있는 경력에다 문제투성이의 판결을 한 페인 판사를 보고 듀폰의 대리인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함량미달인 페인 판사에게 솔로몬의 판결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솔로몬의 지혜를 구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코오롱이 항소심에서 분투해야겠다.

염성덕 논설위원 sdyu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