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철저히 준비하는 자가 역사의 승리자… ‘역사를 움직인 프레젠테이션’

입력 2012-09-06 18:35


역사를 움직인 프레젠테이션/하야시 야스히코/작은 씨앗

고인이 된 애플의 전 최고경영자(CEO) 스티브 잡스는 ‘프레젠테이션의 달인’이라는 평가를 들었다. 청중은 잡스가 세상에 내놓은 제품에 열광했지만, 잡스의 프레젠테이션 그 자체에 환호하기도 했다. 실제 잡스는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할 때마다 무대 구성부터 음향까지 치밀하게 신경 썼다. 그래서인지 2009년 미국 맥월드 엑스포에서 잡스의 기조연설이 취소되자, 많은 사람들이 항의하기도 했다. 일본의 광고 기획·제작자인 저자는 역사적 인물들을 흥미롭게도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프레젠테이션의 달인이라는 관점에서 해부한다.

콜럼버스는 모험가?… 위대한 플래너

그의 레이다망에 포착된 위인 중 한 명이 바로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1451∼1506)이다. 저자가 내놓는 분석은 사뭇 설득력이 있다. 콜럼버스가 살았던 15세기는 공식적으론 천동설의 시대였다. 하지만 천문지리학 및 지도학 등의 발전 덕분에 지구는 네모가 아닌 공처럼 둥근 모양을 하고 있다는 게 슬슬 상식이 되어가던 시대이기도 했다. 그래서 대서양을 서쪽으로 항해하면 섬이나 육지를 발견하게 될 거라는 이야기는 당시만 해도 독특한 발상은 아니었다. 그걸 실행에 옮기려는 사람은 콜럼버스 외에도 여러 사람이 있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역사의 승자와 패자를 갈랐을까. 저자는 그 비결을 프레젠테이션 능력에서 찾는다. 1491년 말 스페인 여왕 이사벨 1세 앞에 선 콜럼버스는 “대서양을 가로질러 새로운 육지를 발견하겠다”고 제안한다. 하지만 그는 ‘정직하게’ 프레젠테이션 하는 어수룩한 사람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이런 식으로 말이다. “대서양을 항해하고 싶습니다. 그 여정에서 아마도 새로운 섬과 육지를 발견하게 될 겁니다.”

대신 그는 스페인 여왕의 감성을 한껏 자극했다. “항로 개척에 상대적으로 뒤처진 스페인으로서는 아프리카를 우회하는 동방 항로에 한 발 늦게 뛰어들어 봤자 포르투갈을 결코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저는 스페인이 기사회생할 수 있는 확실한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서쪽으로 우회해 가는 동방 항로를 개척하는 일이 그것입니다. 무엇보다 황금의 나라 지팡구를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62쪽)

이 노회한 프레젠테이터는 2등의 조바심을 건드릴 줄 알았다. 당시 스페인은 지리상의 대발견 경쟁에서 포르투갈에 뒤처져 있었던 것이다. 또 황금의 나라 ‘지팡구(Zipangu)’에 대한 환상을 팔줄 알았다. 지팡구는 서양인 최초로 중국(원나라)을 찾았던 마르코 폴로가 쓴 ‘동방견문록’에서 금이 많은 나라 일본을 지칭해 쓴 용어다. 이 나라에선 왕의 궁전이 지붕에서 바닥, 창문에 이르기까지 온통 금으로 장식돼 있다고 하니, 얼마나 동경했겠는가.

첫 술에 배부르랴… 실패에서 배우는 프레젠테이션

사실 콜럼버스가 항해 지원을 처음으로 요청한 나라는 포르투갈이었다. 하지만 포르투갈 국왕 앞에서의 1차 시도에서 순진하게 정보를 모두 누설하는 바람에 낭패를 겪었던 그는 스페인 프레젠테이션에서는 정보를 조금씩 흘리는 노련함을 보였다.

사전 준비도 철저히 했다. 이탈리아 출신 뱃사람에 불과한 그였지만, 이미 포르투갈어를 익힌 데 이어 스페인어를 짧은 기간 내에 습득했다. 또 그 분야 정통한 학자들과 당당히 논쟁할 수 있는 이론적 실력도 갖추었다. 그가 공부에 매달리며 귀중한 정보를 얻은 서적들은 지금도 스페인 세비야의 콜럼버스 도서관에 잘 보존돼 있다. 마르코 폴로의 1458년 라틴어판 ‘동방견문록’, 1483년에 나온 프랑스 지리학자 피엘 다이의 ‘세계상’, 로마 교황 비오 2세의 1477년도판 ‘세계지’ 등이 그것들이다. ‘동방견문록’과 ‘세계상’의 여백에는 콜럼버스가 직접 쓴 메모가 남아 있다.

이런 자신감과 실력을 갖춘 그였기에 엄청난 성공 보수를 요구하는 배포가 있었을 것이다. “새로운 항로의 항해에서 발견된 섬들과 대륙의 총독으로 임명할 것. 그곳에서 토지 및 교역을 통해 얻게 되는 금·은·진주·보석·향료 등 모든 상품 가격의 10%를 자신의 몫으로 인정할 것.”

일견 무리해 보이는 이런 요구는 후발주자인 스페인 여왕의 조바심을 간파했기에 가능했던 승부수이기도 했다. 나아가 콜럼버스는 행운까지도 기획할 줄 아는 위대한 플래너였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콜럼버스가 포르투갈에서 실패하고 스페인의 항구 팔로스에 도착한 후 자신의 아들을 맡긴 라비타 수도원 원장이 이사벨 여왕의 고해신부였기 때문이다. 콜럼버스의 아내는 불행히도 일찍 죽었다.

책에선 콜럼버스 외에도 매력적인 프레젠테이션으로 원하는 것을 손에 얻고 역사의 흐름까지 바꾼 여러 동서양 인물들의 이야기와 비법들이 소개된다. 음악 프레젠테이션으로 세계 최대 축제인 올림픽 부활을 일궈낸 프랑스의 피에르 드 쿠베르탱, 치열한 프레젠테이션 끝에 일본 전국시대를 끝내고 천하 제패에 성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일본 에도시대에 러시아에 표류했다가 여황제 예카테리나 2세의 마음을 움직여 고국행 배를 손에 쥘 수 있었던 다이코쿠야 고다유 등이 그들이다.

이처럼 감동적이면서 의표를 찌르는 프레젠테이션을 강조하는 저자지만, 요즘 널리 활용되는 파워포인트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파워포인트는 많은 사람 앞에서 강의 형식으로 설득할 때는 효과적이지만 중요 인물의 마음을 움직여야 할 때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홍성민 옮김.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