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해영 (5) 기도대로 4년간 국내외 기능대회 금메달 싹쓸이

입력 2012-09-06 17:46


‘마음을 담대하게 가져라’ ‘어디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의 여호수아 말씀은 내게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래도 사랑해 주시던 분이 주신 선물이니 어디를 가든 성경책을 펴서 읽고 외웠다. 내가 초등학교 졸업 후 유일하게 받은 교육은 6개월간의 직업교육뿐이었다. 그 후로는 한국에서 학교를 다녀본 적이 없다. 어려운 가정형편과 장애로 학교를 다니기 힘들었기에 나는 공장에서 노동을 하는 편물기능사로 10대를 보냈다.

사람마다 인생의 기회가 온다더니 내 불우한 인생에 첫 기회가 찾아왔다. 내가 17살 때 당시 기술교육원의 편물과 윤은숙 선생님께서 교육원의 대표로 전국장애인기능대회에 나가보라는 제안을 하셨다.

“네가 훈련생이었을 때 너를 눈여겨보았는데 기능대회에 출전한다면 잘할 수 있을 것 같더구나. 아직 어린 나이니 몇 년 동안 착실하게 준비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게야.”

나는 기능대회에 입상하거나 금메달을 따면 어떤 일들이 생길지 계산한 뒤 노력할 만큼 영리하지 못했다. 다만 매번 무엇을 하든지 죽을 만큼 최선을 다해서 노력한다는 마음가짐은 갖추고 있었다. 때문에 난 무슨 기회이든지 열과 성을 다해 기술을 배웠다.

1982년 처음으로 전국장애인기능대회에 출전해 장려상을 받았고, 이듬해 같은 대회에서 금메달을 받았다. 자신감을 얻은 나는 일반 청소년들이 출전해 실력을 겨루는 대회에 나갈 목표를 세웠다. 각고의 노력 끝에 지방대회 선발전을 거쳐 84년 인천에서 열린 19회 전국기능경기대회에서 기계편물 부문 금메달을 차지했다. 대회가 끝난 뒤 입상 선수단은 청와대를 방문했다.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영빈관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얼떨떨하게 서 있는 내게 노신사 한 분이 다가와 반갑게 인사하며 악수를 청해왔다.

“얘, 너도 왔구나. 나는 정한주 노동부 장관이란다. 지난번 시상식에서 내가 너에게 금메달을 걸어줬지. 그때 일등 단상에 서기 위해 네 작은 키로 얼마나 노력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많이 감동했단다. 더욱 열심히 노력하거라.”

장관님의 격려는 그날 대통령을 만나고 맛있는 음식을 먹던 그 어떤 일보다 더 내 마음에 남았다. ‘아, 사람들은 내가 노력하는 것을 알아주는구나. 그렇게 애쓰고 눈물 흘리고 고통을 참으며 사는 것을 알아주는구나.’ 생각할수록 정말 고마운 말이었다.

85년 9월엔 콜롬비아에서 열린 2회 세계장애인기능대회에 한국 대표로 출전해 남미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27명의 선수단이 일본, 미국, 멕시코, 파나마를 거쳐 콜롬비아에 도착했을 때는 추석이었다. 한국에서 단편기로 연습했던 것과 달리 대회에서 처음 사용하는 양편기로 경기를 치렀지만 결과는 매우 좋았다. 대회에서 한국은 종합 1위를 했고, 나는 금메달을 땄다. 이 일로 나는 그해 12월 철탑산업훈장을 받았다.

한국에 돌아오니 내가 한 일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축하해줬다. 4년간 기능대회를 치르며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힘을 주고 격려해 주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내가 최선의 노력을 다해 됐구나. 역시 노력하면 뭐든 된다’는 인간적인 믿음도 생겼다. 하지만 나는 어린시절부터 인생은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은 거의 없으며 세상살이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 성공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었다.

‘왜 내게 이런 일이 생겼지?’ 20대 초반에 윤 선생님의 추천으로 산업연수생이 되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 연구소에서 있으면서 갑자기 용인의 교회 사모님이 내 작은 주먹손을 쥐고 간절하게 드린 기도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 손으로 만든 옷이 세계 최고의 것이 되게 해 주시고.”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이루어지게 하신 하나님의 존재가 감사를 넘어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갸우뚱거리던 의문에 답이 보였다. “아, 그랬구나, 그런데, 그 다음 기도가 뭐였지.”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